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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진단]-탄생 100주년, 성공신화에 어린 ‘인간 정주영’

위대한 경영 정주영, 그도 아프고 아픈 아버지였다

아들들 사고·극약·투신 잇단 사망…대물림서 ‘아들난’ 그룹 찢긴 후 운명

최성규기자(powwow12@skyedaily.com)

기사입력 2015-10-14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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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조선·자동차 산업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빈손으로 시작해 굴지의 대기업을 일군 정 명예회장은 직장인이 존경하는 CEO 1위, 대학생이 존경하는 CEO 1위, CEO가 존경하는 CEO 1위 등 과거 여러 설문조사에서 세대와 시대를 아우르고 관통하는 ‘위대한 경영인’이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정 명예회장은 이처럼 성공도 평판도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올해는 정 명예회장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위원장 정홍원)’는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탄생일인 11월 25일을 앞두고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정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정신을 표현한 ‘아산 100년, 불굴의 개척자 정주영’을 슬로건으로 정 명예회장의 업적을 되새기고 현시대에 그의 철학과 도전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현대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정 명예회장은 지난 2006년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뽑힌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가장이자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는 고뇌하는 사람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스카이데일리가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성공한 기업인이기에 앞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버지의 모습인 ‘인간 정주영’을 회고했다.

 ▲ 1915년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씨 사이에서 7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939년 변중석 여사와 결혼, 슬하에 8남1녀의 자녀를 뒀다. 정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몽(夢)자 항렬을 지닌 자녀들과 영(永)자 항렬을 지닌 형제들은 현대 각 계열사의 수장직을 영위하며 국내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아끼던 동생을 교통사로로 잃은 후 아들 3명도 사고 및 극약·투신 자살을 하는 비운의 아버지가 됐다. 사진은 종로구 청운동 고 정주영 명예회장 자택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농사꾼 되라는 아버지 뜻 거스르고 가출해 금의환향 했던 ‘청년 사업가’
 
고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경제인이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그는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손꼽힌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7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 명예회장의 호 아산(峨山)은 고향 마을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정 명예회장은 고향을 중요시 여겼다.
 
소년 정주영은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 들어가 3년 동안 천자문을 비롯해 논어·맹자를 배웠다. 그는 뒤늦게 통천송전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월반을 거듭해 전체 27명 중 2등으로 졸업했다. 정 명예회장의 정식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이다. 1등 했던 친구는 뒷날 형무소 간수가 됐지만 2등을 한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총수가 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부산항과 원산항이 개항되고 경원선이 개통되던 개화기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에 의해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기였으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농사를 짓던 시절이었다. 정주영의 선친은 소작을 할 수 있는 농토를 넓히는 것이 소원이었고, 당연히 장남 정주영이 농사꾼이 되기를 바랐다.
 
정주영이 소학교를 졸업한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배를 곯는 일은 다반사였다. 정주영은 마을 구장댁에 배달된 신문을 통해 청진항과 제철공장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봤을 것으로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정주영은 14세에 마을 친구와 같이 가출을 시작했다. 변호사가 되거나 큰돈을 벌겠다며 가출을 네 번이나 단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늘 미수에 그쳤다. 부친은 6남2녀의 장남이자 장손인 정주영이 농사를 지어야 집안이 편안해진다는 확신으로 아들을 찾아내 설득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달아난 마지막 가출 이후 복흥상회에 취직한 정주영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탁월한 부기 능력으로 주인에게 능력을 인정받는다. 주인은 자신의 난봉꾼 아들 대신 정주영에게 가게 인수를 제안했다.
 
1938년 1월 청년 정주영은 신당동 길가에서 처음 본인의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경일상회다. 당시 정주영의 나이 스물넷, 고향을 떠난 지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정주영은 미곡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일제가 쌀을 배급제로 통제하기 시작하자 가게를 처분하고 7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부친에게 논 2000평을 사드리고 장가도 들었다.  
 
 ▲ [도표=최은숙] ⓒ스카이데일리

전무후무 굴지의 현대왕국 신화…동생 1명·자녀 3명 ‘비운의 운명’ 몸으로 맞다
 
정주영은 고향 통천의 평범한 처녀였던 변중석과 결혼했다. 정주영은 부친이 정해준 여자가 아닌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평범한 농가 출신인 변 여사를 아내로 맞아 그 사이에서 8남1녀를 뒀다.
 
정주영은 7명의 형제와 8남1녀의 자녀, 20여명의 손자손녀를 둔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현대’라는 이름 아래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들은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 정순영 전 성우그룹 명예회장,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신영 전 동아일보 기자,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이다. 동생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다복해 보이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정에도 아픔은 따랐다. 정 명예회장은 동생 1명과 자녀 3명을 사고나 자살로 잃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첫 번째 비극은 장남 고 정몽필 인천제철 회장이다. 정몽필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자녀 중 가장 빨리 세상을 떠났다. 정몽필은 적자 국영기업 인천제철을 인수해 정상화시키기 바쁜 과정에서 1982년 4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몽필은 경부고속도로에서 12톤 트레일러를 추월하려다 옆구리를 들이받아 발생한 차량 엔진 화재로 운전 기사와 함께 그 자리에서 46세로 사망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교통사고로 일가를 잃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넷째 동생 정신영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6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 잠시도 일에서 손을 놓은 적이 없다던 정 명예회장은 동생 정신영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 일주일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이자 현대알루미늄 회장인 정몽우는 지난 1990년 호텔에서 극약을 마시고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온 정몽우 회장이 우울증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도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허망하게 숨진 넷째 아들을 안타깝게 여겨 손자들을 특별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정주영 명예회장은 다복한 가정을 이뤘지만 그림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자녀들 가운데 장남 몽필씨는 자동차 사고로, 4남 몽우씨는 음독 자살로, 5남 몽헌씨는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해온 2남 몽구씨는 아버지를 거스르고 나와 현대차그룹을 이끌고 있다. 사진은 계동 사옥 집무실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살아생전 모습 [사진=뉴시스]

2001년 타계한 정주영 명예회장은 비록 5남 정몽헌의 죽음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대가의 비극은 계속됐다. 적통으로 평가받은 현대그룹을 이끌던 정몽헌은 2003년 8월 서울 계동 사옥에서 투신해 재계에 큰 충격을 줬다.
 
후계 대물림서 ‘왕자의 난’에 그룹 찟어지는 아픔…명예회장 버린 후 이듬해 운명
 
정몽헌은 1998년 현대그룹 공동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후계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형들을 제치고 단독 회장이 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현대가 ‘왕자의 난’이 발생해 현대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분리되는 일을 겪게 된다. 지금 현대그룹은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뿔뿔이 찢어졌다.
 
형제의 난은 사실상 장남의 역할을 했던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동생 정몽헌 회장에게 선공을 가하며 촉발됐다. 이 사건은 인사권자인 정몽헌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정몽구가 사장 인사가 단행되며 발생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몽구와 정몽헌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정몽헌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1998년부터 현대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경영자협의회 의장은 정몽구와 정몽헌 공동의장에서 정몽헌 한 사람으로 정리됐다.
 
 ▲ ⓒ스카이데일리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현대차그룹을 독립해 나간 정몽구는 승승장구했다. 반면 부친 정주영의 유지를 받들었던 정몽헌은 사면초가 신세에 처하게 됐다. 현대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겪는다.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등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처하며 정몽헌의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현대그룹의 가장 큰 문제는 정주영의 ‘혼신의 역작’ 대북사업이었다.
 
대북 사업이 시작된 1998년 이래 2000년 상반기까지 현대그룹 계열사를 통해 북한에 투입된 자금 규모는 2조5000억원이 넘었으나 대북 사업은 퇴로조차 보이지 않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건설의 경영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결국 ‘대북 송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정몽헌은 2003년 8월 서울 계동 사옥에서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주영의 3남 정몽근은 명예회장으로서 현대백화점그룹을 맡았다. 6남 정몽준은 정계로 진출했다. 7선 국회의원으로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했다. 7남 정몽윤은 금융권으로 진출해 현대해상화재보험을 이끌었다. 딸 정경희는 정희영 선진종합 회장과 결혼했다.
 
​‘아시아의 영웅’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현대그룹을 재계 1위 기업으로 키웠다. 외환 위기 이후 삼성에게 선두 자리를 내줬지만 현대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대기업 총수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버지였던 정 명예회장은 본인의 형제와 자녀들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키운 뒤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나 이듬해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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