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과 수난의 시대를 극복하는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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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스피노자 <에피카>

불확실성 시대,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정념과 수난을 극복하는 윤리학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6-11-12 17:02:05

▲ 문화평론가 정현. ⓒ스카이데일리

‘The Passion of Jesus Christ’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된다. 이 표현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수난’으로 번역되는 ‘Passion’이다. ‘Passion’의 형용사형은 ‘Passive’다. 보통 ‘수동적인’, ‘열정적인’ 등으로 번역된다. 수동적이라는 뜻과 열정적이라는 뜻이 왜 한 단어에 담겨 있는 것일까? 열정은 어떤 적극성을 드러내는 표현인 반면 수난은 내가 다른 무엇에 의해 수동적으로 당하는 상태를 함의한다.

‘Passion’이 열정과 수난의 의미를 동시에 갖는 이유는 이 단어의 열정이라는 뜻이 사실은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종종 ‘정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 있고, 자기 시선이나 통제권 밖에서 유래하는 감정이 있다. 그는 전자를 ‘적극적인 정서’로 후자를 ‘소극적인 정서’로 이해했다. 이 소극적 정서를 스피노자는 정념이라고 불렀다. 정념은 곧 수난과 연결되기도 한다.

슬픔의 원인이 되는 수동성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경우는 스스로 이해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일이 닥칠 때다. 조선 산업 불황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거제도의 누군가는 생계가 불투명해지면서 한없는 불안을 느낀다. 여성 살해가 빈번해지는 오늘날 여성들은 홀로 어두운 거리를 걷는 것에 심각한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일상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혹시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분노의 멘트가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한 건 아니었을까?’, ‘학교에서 한 친구와 다투었는데 그 친구 때문에 내일 왕따가 되는 것은 아닐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됐는데 그럼 한반도는?’ 인간이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은 미래라는 것이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내 이해력과 통제권 밖에 있을 때 스피노자는 그것을 외부원인에 의한 정서라고 했다. 인간은 외부원인에 자극받을 때 불안과 슬픔에 쉽게 노출된다.

대중의 속견에서 명예를 찾는 자는 명성을 보존하기 위해 매일 매일 걱정 속에 불안해하면서 애쓰고 행동하며 시도하게 된다. -에피카, 4부 정리 58-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연예인이나 여타 공인들이 우울증과 불안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중과 팬들은 아무런 연계도 없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변심은 연예인들의 불안을 낳는 일종의 외부원인이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일상의 개개인에게도 통한다. 직장과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나는 이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는가? 최근 연구들은 SNS 활용 시간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행복감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SNS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가 늘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타인의 ‘좋아요’ 누르기를 예견할 수 없다. SNS는 외부원인들에 정서를 매일매일 노출시키는 신세계의 플랫폼이다.

기쁨의 원인이 되는 적극성과 공통성

반대로 스피노자는 세상이 자기 인식에 더 많이 부합할수록 인간은 기쁨을 불러온다고 말한다.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이 내 이해의 범위에 더 많이 들어온다는 것을 뜻한다. 낯선 것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완전해진다. 선(善)이란 곧 나의 완전성을 더 많이 갖추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는 광활하고 나는 우주 속 먼지 같은 작은 몸뚱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말한다. 더 많은 공통성을 발견하라. 타인과 나 자신의 본성이 공유하는 세계의 원리를 인식하라.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외부원인에 의해 슬픔을 느낀다면 그 외적 원인을 내 인식으로 가져옴으로써(인식함으로써) 기쁨으로 전환시키면 된다. 희망과 공포는 모두 막연한 것에 대해 갖는 감정이기에 필요한 것은 낯설고 막연한 것들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정념과 수난의 시대의 윤리학

공통성을 인식하라는 것은 두 가지 경로를 갖는다. 하나는 추상적이지만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기불황이 지속될 때 그 불황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면 불안은 감소되고 미래는 좀 더 장밋빛이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공통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수많은 공동체들이 있었다. 도시화는 공동체를 파괴했고, 과도한 경쟁은 삶을 지치게 했으며, SNS는 정서를 외적 자극에 일상적으로 노출시킨다. 모두가 경쟁자이며 그 경쟁자들에게 일상의 감정이 노출되는 사회에서 삶이 행복할 리 없다.

공통적이라는 것은 서로가 함께 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뜻한다. 한동안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과 피로를 호소했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며 크게 회자된 단어가 ‘앵그리 화이트’다. ‘분노한 저소득층 백인’. 함께하는 것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이 ‘분노’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라는 정념에 사로잡혀 있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