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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리학자 김태규 칼럼니스트 ⓒ스카이데일리
지난 5일은 소한(小寒)이었다.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하늘은 화(和)를 않았으되 내려오지 않고 땅은 기(氣)를 품었으되 올라가지 않는다. 그저 텅 비어 적막하고 쓸쓸하고 고요한 가운데 어둡고 어슴푸레해서 어떠한 조짐도 없다. 기는 오로지 깊숙하고 아득한 곳에 통해있을 뿐이다”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를 묘사한 것 같은 이 문구들을 오래 전 접했을 때 많은 상상을 했었다. 마치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지창조 신화와도 같았다.
천체물리학에서 우주의 시원에 관한 빅뱅(Big Bang) 가설을 처음 접하고 나면 ‘아니 그렇다면 빅뱅 이전엔 무엇이 있었지. 어떤 상태였지’라고 몹시 궁금해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주의 크기는 138억 광년(光年)이라고 천문학자들은 말한다.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빛이 138억년 동안 달려가는 거리란 뜻이다. 엄청나게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또한 138억 광년에 한정되는 유한한 크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우주가 유한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우주 저편에는 무엇이 있지. 무엇이 절대 있을 수가 없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이르고 나면 그만 답답해진다. 공간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공간이 없어진다. 과연 어떻게된 것인가.
사실 우리는 무(無)의 상태를 상상해볼 수가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접했던 것들 즉 유(有)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창조를 한다고 해도 그 창조는 근거가 되는 무엇인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지 전적인 무의 상태에서 창조가 촉발될 수 없는 법이기에 그렇다.
이쯤에서 다시 앞서 소개한 회남자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하늘은 화를 안았으되 내려오지 아니하고 땅은 기를 품었으되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런 상상은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잘 생각해보면 적어도 저런 상태를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로부터 힌트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은 대략 10년 전이었다. 지난 2007년 1월 어느 날 해질 녘 서울 근교 양수리의 강변 근처에 나갔다가 문득 알게 됐다.
해가 이미 졌고 어둠이 빠른 속도로 내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땅을 밟았는데 그 땅이 너무나도 딱딱해서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던 땅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어떤 이질감이 느껴졌다.
1월의 한겨울이라 땅이 꽁꽁 얼어있었던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맨땅을 밟아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흙이 깔린 땅은 관념적으로 으레 부드럽고 폭신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겨울 서울 근교의 차가운 대기 밑에 놓인 얼어붙은 맨땅이 그렇게까지 단단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1월의 얼어붙은 땅은 마치 나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땅은 내게 아무런 정나미가 없는 것 같았고 나 역시 그런 땅에게 친근한 마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야, 땅이 정말 매정하네, 매정한 당신이네”라고 말했다. 만나기만 하면 당연히 반겨줄 줄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모진 박대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잠시 당혹감을 멈추고 나는 차갑고 단단한 땅을 몇 걸음 좀 더 밟아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너 무슨 마음인데. 내게 삐친 거니”라고 땅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이윽고 땅이 답했다. 땅은 “네가 생각하는 땅이란 밝으면 으레 늘 폭신한 줄로 여겨서 그런 거야 하지만 그건 고정관념이야”며 “너에게 토라진 것이 아니라 1월의 땅은 원래 이렇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1월의 땅은 마치 콘크리트처럼 스며든 수분으로 인해 꽁꽁 얼어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는 하늘 또한 그저 시릴 정도로 냉랭했다. 바람은 없었지만 얼마 걷지도 않아서 뺨은 물론이고 혀까지 얼어붙을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의 벗은 나무들도 그저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러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앞에서 소개했던 회남자의 문구들이 기억났다.
‘하늘은 화를 안았으되 내려오지 아니하고 땅은 기를 품었으되 올라가지 않는다. 그저 텅 비어 적막하고 쓸쓸하고 고요한 가운데 어둡고 어슴푸레해서 어떠한 조짐도 없다. 기는 오로지 깊숙하고 아득한 곳에 통해있을 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회남자의 문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1월의 어느 저녁 시간에 멀리 얼어붙은 팔당호가 보이는 수풀 언저리에서 회남자의 문구에 나오는 풍경을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결국 회남자의 풍경은 바로 1월의 풍경으로부터 발휘된 상상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지난 5일이 소한이었고 그로서 ‘축월(丑月)’이 시작됐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기온은 대단히 포근하다, 마치 어디에선가 봄소식이라도 들려올 것처럼. 하지만 땅을 밟아보라. 아주 딱딱하고 생경할 것이다.
새해가 시작됐지만 실은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 화기를 머금고만 있을 뿐 그것을 내리지도 않고 올리지도 않고 있다. 천지가 잠시 쉬고 있는 것이다. 명명(冥冥)한 속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침이면 일어나 일터로 나가고 저녁이면 들어오지만 그건 생활의 루틴(routine)이고 해오던 것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 속 역시 저 축월의 땅처럼 쉬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아니면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거나.
하늘과 땅의 화기가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고 또 오르기 시작해야만 한 해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가 언제가 되는가. 그건 양력 2월 중순 경의 우수(雨水)라 여기면 된다. 올해의 경우 우수를 찾아보니 2월 18일이라 돼있다.
해는 나날이 길어질 것이니 그건 하늘이 화를 베푸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얼어붙은 땅이 열을 받아들인다. 그러다보면 땅속의 얼음이 녹기 시작할 것이니 그 녹은 물이 삼투압 현상을 통해 지표면으로 올라올 것이다. 지기(地氣)가 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말라붙은 개나리 가지의 수관을 통해 물이 올라와 뻣뻣하게 그저 말라붙은 ‘미라’같던 가지가 어느 순간 말캉해지고 말랑해진다. 그때가 바로 우수인 것이다. 지표면으로 올라온 수분은 그에 머물지 않는다. 허공으로 증발한다. 그러면 그게 초봄의 미약한 아지랑이이다.
증발하는 수분이 날로 더 많아지면 어느 순간 햇빛을 받아 우리 눈에 얼른거리는 아지랑이 무리가 될 것이고 바다에는 해무(海霧)로 서려올 것이다. 그러면 3월이 시작된 것이다. 새해의 진정한 시작은 이처럼 아지랑이와 함께 한다. 그리고 다시 시일이 더 지나면 마침내 개나리가 꽃봉오리를 터뜨릴 것이다. 본격저으로 새해가 되는 시기는 바로 이 때다.
지금의 날을 새해라 하지만 실은 쉬면서 새해를 준비하고 있는 때라고 해야 보다 맞는 말이 된다. 시작의 시작으로서의 1월이다.
작업실 창 아래 목련이 깊은 잠에 취해있다. 심하게 말하면 혼수상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2019년부터 2024년까지 60년에 걸친 국운 순환에 있어 축월이 된다.
이에 대한민국의 하늘과 땅은 잠들게 될 것이고 명명하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쉬게 될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나라가 혼수상태라 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혼미한 대한민국이라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라가 망했다는 말도 할 것이다.
하지만 축월은 축월대로 반드시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점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멀리 가기 위해선 때론 잠도 자야 할 것이고 쉴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우리가 2019년부터 2024년에 걸쳐 겪게 될 환경은 바로 지금 바깥에 나가보면 거리에서 온몸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많이 궁금하다면 나가서 직접 느껴보시면 되겠다.
김태규의 희희락락호호당
http://www.hoho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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