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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윤봉근 해처럼달처럼사회복지회 회장

“하체마비 절망 딛고 장애인들 삶과 죽음 돌보죠”

절망 속에서 마주한 참담한 장애인 현실…무료봉사로 ‘제2인생’

오만학기자(mhoh@skyedaily.com)

기사입력 2017-05-16 0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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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봉근(59·사진) 해처럼달처럼 사회복지회 회장은 하반신마비 장애인이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후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회복지회를 만들어 24년간 각종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죽음과 탄생은 같은 선상에서 바라봐야 해요. 장례에는 사람에 대한 가치가 담겨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은 정체성을 깨닫기도 하죠.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는 복지에 눈을 돌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 부모세대들의 외로운 죽음에는 무신경하기 마련이죠. 장례봉사를 통해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해처럼달처럼사회복지회 윤봉근(59·남) 회장은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장례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진정한 의미의 복지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드러냈다. 윤 회장은 전국을 돌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복지재활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기초생활수급자들과 같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에게는 무료 상조서비스도 베풀고 있다.
 
갑작스런 사고와 하반신 마비…아내마저 떠난 절망에서 마주한 장애인들의 현실
 
윤 회장은 처음부터 사회복지전문가로 활동한 인물은 아니었다. 본래 그는 중견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던 건실한 청년이었다. 지난 1992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당한 교통사고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1992년 설 무렵이었어요. 업무 차 지방에 내려가다 마주 오는 차와 추돌했죠. 하늘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하반신 마비가 왔어요.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됐죠. 결혼한 지 불과 1년여가 흘렀을 때였어요. 사고가 난 뒤 3개월 만에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더라고요. 정말이지 ‘절망’이란 단어 외에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 윤봉근 회장(사진)은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얻은 후 이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지만 한 살배기 딸과 노부모를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 남다른 의지를 갖고 재기에 도전했다. ⓒ스카이데일리

하반신 감각과 아내를 잃은 그에게 남은 것은 한 살배기 딸과 노부모가 전부였다. 배변활동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망가졌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그 일념으로 힘든 재활치료를 버텨갔다.
 
“제 사정을 접한 주변인들이 ‘무엇 무엇이 좋다더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특히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홀로 배변활동조차 못했는데 이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줬죠. 다들 알음알음으로 알아와 제게 알려주는 식이었어요”
 
“그런 것들이 제겐 실낱같은 희망이었어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지인들이 알려준 몸에 좋다는 약이며 음식, 치료법 등을 일일이 쫓아다녔어요. 하지만 헛수고였죠. 엉터리 정보였던 거에요. 근데 그 때 기분이 나쁘기보다 안타까웠어요. 이런 정보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깨닫게 된거죠”
 
그릇된 정보임을 깨닫게 될 때마다 그는 하반신 불구자에 거짓 정보를 줬다는 분함보다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정보만을 의지해야 하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인지하게 됐다. 또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다. 비로소 장애를 갖게 된 후 장애를 가진 이들의 현실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때 다짐했어요. 내가 겪어야만 했던 혹은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갑작스레 장애를 갖게 됐고 절망을 맛봤지만 또 다른 삶이 시작된 것이었죠. 사고 후 약 1년이 지난 1993년 4월 장애인·정신질환자 등 어려운 이웃을 돕는 해처럼달처럼사회복지회를 출범하게 됐습니다”
 
하반신 마비 불구 더 어렵고 불편한 이들 손수 방문…기름값만 1년에 수억원 쓸 때도
 
그후 윤 회장은 최근까지 무려 24년여 간이나 전국을 돌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올바른 배변 방법을 몰라 불구의 몸을 이끌고 고생하는 ‘제2의 윤봉근’을 막기 위해 다양한 의료정보를 제공했다. 이후 독거노인·소년소녀가장들도 돕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정말 어려운 분들 많이 만났어요. 저보다 어려운 분들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지 놀랍기도 했죠. 대게 지원도 후원도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었죠.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도움을 주게 됐고 점차 하는 일도 많아졌어요. 전국 팔도를 매년 돌다보면 기름 값만 1년에 수억원 들 때도 있어요”
 
 ▲ 윤봉근 회장(사진)은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하나둘 만나다 보니 점차 하는 일도 많아졌다”고 설명한다. 그는 생활지원을 하며 다양한 이웃들의 삶을 마주하다 장애인들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무료장례사업도 전개하기 시작했다. ⓒ스카이데일리

현재 해처럼달처럼 사회복지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인원은 연간 600~700명 수준이다. 윤 회장은 봉사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후원을 통해 충당한다. 윤 회장은 사회복지회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무료장례사업도 펼치고 있다. 어려운 이들의 생활지원을 하며 다양한 이웃들의 삶을 마주하게 되면서 마지막 가는 길도 손수 돌보고자 결국 장례사업에도 손을 대게 됐다.
 
“1993년 당시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이 50만원이었는데 25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75만원 안팎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죠. 생활비로도 턱없이 부족한 이 돈으로 장례는 도저히 불가능해요”
 
“하루는 사회복지공무원들이 장애인들이 죽으면 마대자루 같은 삼배에 시신을 돌돌 말아 화장시킨다는 얘길 듣게 됐어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군요. 평생을 사회의 외면 속에서 살아 온 이들도 임종 때면 죽음의 두려움 탓에 입을 꽉 다문 채 죽어가요.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도 온전치 못한 현실에 정말 나라도 나서야겠다 싶더라고요”
 
장애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작한 무료장례사업을 시작한지 벌써 20년이 흘렀다. 윤 회장은 그동안 직접 수습한 시신만 50구가 넘는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례복지 대상범위 또한 확대됐다. 장애인·기초생활수급자 등에서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도 장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윤 회장은 약 2년 전부터는 ‘복지백서’ 발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24년간 복지현장을 누비며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압축해 복지활동을 위한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윤 회장은 몇 해 전부터 기억력 감퇴 현상이 찾아와 스스로를 재촉하게 됐다.
 
“제가 복지사업을 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함이죠. 양심을 속이고 영리를 취하려했다면 복지백서 발간에 몰두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사실 제가 몇 해 전부터 원인 모를 기억력 감퇴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기억이 모두 없어지기 전에 노하우를 담은 매뉴얼을 사회에 내놓는 것이 제 마지막 소명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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