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맹목적 ‘코드 맞추기’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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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욱 기자페이지 + 입력 2017-06-09 09:48:36

▲ 이기욱 기자(금융부)

최근 은행권은 ‘문재인 코드 맞추기’에 한창이다.

후보시절 ‘비정규직 제로 정책’ ‘서민구제 금융’ 등을 내세웠던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되자 각 은행들이 앞 다퉈 새정부 맞춤형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정규직 감소 정책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줄곧 비정규직 감축을 강조해왔다. 이에 인천공항공사와 같은 공공기관은 문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단 3일 만에 비정규직 1만명을 정규직화 하는 등 정책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은행권 역시 마찬가지다. 씨티은행은 지난달 17일 은행 중 가장 먼저 비정규직 3000명을 정규직으로 일괄전환 하겠다고 밝혔으며 기업은행 역시 현재 ‘노사 합의 TF’를 구성해 창구 담당직원 3000여명에 대한 정규직 전환을 논의 중이다.

신한은행은 지난 21일 올해 안에 비정규직의 일부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했다. 전환 대상은 사무직 비정규직 170여명이며 전환 규모는 60~70명이다. 농협중앙회도 지난달 말 은행, 마트 등에 근무 중인 비정규직 5245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서민구제 정책에 대한 움직임도 한창이다. 문재인정부는 지난 14일 내각 구성이 완료되는 대로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소액·장기 연체 채권에 대한 소각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후보시절 내세운 공약에 따르면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채권 중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에 해당하는 채권들은 소각 대상에 포함된다. 수혜자는 약 43만7000명이며 총 규모는 1조9000억원에 달한다.

우리은행은 지난달 26일 정부의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특수채권을 전량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특수채권은 회수가능성이 없어 이미 상각(손실) 처리한 대출채권을 뜻한다. 소각대상은 기초생활 수급자와 고령자 등 사회 취약계층 등을 포함한 개인고객이며 그 수는 1만8835명에 달한다. 총 금액은 1868억원이다.

신한금융, KB금융 등도 올해 초부터 소멸시효 완성 채권 소각에 나섰다. 각각 총 금액은 4400억원, 9800억원이며 대상자는 1만9424명, 9만7000명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은행권의 정부 ‘코드 맞추기’가 세부적인 고려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숫자로 나오는 비정규직 비율을 줄이기 위해서 은행들이 비정규직을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정규직 전환시키고 있다”며 “파트타임으로만 근무할 수 있는 직원들은 오히려 고용이 불안해지게 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한 비정규직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콜센터’ 직원들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수준이다. 지난해 말 서울노동권익센터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권 비정규직 중 콜센터 인·아웃바운드 직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70.52%를 차지했다.

그러나 콜센터 직원들의 경우 금융사의 자회사 또는 타 업체를 통해 위탁 운영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본사의 비정규직 감축정책에서 소외돼 있다. 이들이 ‘문재인 코드맞추기’에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구조개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특수채권 소각 정책이 불러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오랜 기간 상환이 이뤄지지 않은 대출채권을 소각하는 것은 공정성에서 어긋나며 도덕적 헤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만약 소액 대출을 받은 후 갚지 않고 소멸시효를 기다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은행의 건전성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은행들은 대출 전 심사를 강화하고 추심 강도를 높여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할 것이다. 결국 모든 피해는 금융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새 정부 출범 후 은행권은 ‘관치금융 탈피’를 주장하고 있다. 정부와 가까운 인물이 금융기관의 수장을 꿰차던 일종의 관례가 근절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금융권 낙하산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은행들이 맹목적으로 정부 정책방향을 쫒아가는 또 다른 ‘관치금융’도 사라져야 한다. ‘내가 먼저’식의 코드맞추기 보다는 효과, 피해 등을 충분히 고려한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

이기욱 gwle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