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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

인간의 세계관 바꾼 사고전환과 개념史…진보·발전·문명 등 어휘 18세기엔 존재無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7-15 13:32:17

“과거에는 ‘역사’의 인식대상은 없었다. 이후 ‘자연’과 대립하여 ‘역사’라는 개념으로 포착됐던 모든 ‘역사들’, 사건, 경험과 삶에 대한 공통적 상위개념은 18세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다소간 어려운 표현으로 쓰였지만 위 문구가 함의하는 바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18세기 이전까지 우리가 ‘진보’, ‘발전’, ‘문명’이라고 부르는 개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명의 반대말은 자연이다.

인간은 18세기 이전까지 자기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간이 아파트로 땅 위의 공간을 새롭게 건축하듯 문명을 ‘건축’한다는 관념은 오직 18세기 이후에 탄생한 관념이다.

‘역사’라는 말에 수반하는 몇 가지 특성들이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진보, 발전, 문명 등이 이 개념과 연관된 단어들이다. ‘역사의 심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는 개인의 평가나 결단을 넘어 시대의 흐름 속에 과거의 오류들을 심판하는 초개인적인 힘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 모든 관념들은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다. 18세기 이후 등장한 이 ‘역사’라는 개념을 시대의 담론이나 개념들을 통해서 역으로 추적한 이가 바로 독일의 개념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렉이다.

개념사와 근대라는 개념

개념사, 즉 개념의 역사라는 것이 존재한다. 모든 개념은 기원을 갖기 마련이고, 기원에 대한 추적으로부터 우리가 망각했던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조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코젤렉은 ‘역사의식’의 탄생을 근대로부터 추적한다. 따라서 그의 개념사 역시 ‘근대’의 사고 패러다임에 주목한다.

우리말로 ‘근대’라고 번역되는 영어 modern의 어원은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다. ‘오늘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시대구분의 엄밀한 용어라고 보기 힘들다.

오늘이 있다면, 단지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을 뿐이다. 반면, ‘근대’라는 단어는 달랐다. ‘근대’라는 시대구분의 용어로 등장하면서 근대 이전의 시대를 분류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했다.

우리가 ‘중세’(medieval times)라고 부르던 시대에 사람들은 ‘중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당대를 뚜렷한 특징의 시대로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어떤 시대도 스스로의 시대를 ‘중간의’(medieval) 시대로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근대라는 개념이 새롭게 의미화되면서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근대는 ‘오늘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패러다임을 갖는 시대로 정의됐다. 근대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는 노이차이트(Neuzeit)다. 이 단어는 19세기에 탄생한 신조어로 원래는 ‘새로운’의 뜻을 갖는 ‘노이에’(neue)와 ‘시대’의 뜻을 갖는 ‘차이트’(Zeit)가 결합돼 생겨난 단어다. 단어의 결합상태로 알 수 있듯, 근대는 이제 기존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인식됐다.

근대의 시대정신

‘새로운 시대’를 표방한 근대는 시대정신의 새로움을 수반하는 여러 관념들을 만들어 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보’라는 개념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정치적 언어로 이해되는 ‘진보’의 개념은 역사 자체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고, 과거의 것들을 허물어 버린다는 역사적 진화의 관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산업혁명이 시대의 속도를 바꾸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혁명이 과거 신분제의 권위를 혁파하고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선언했다.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한 근대의 시대정신은 작가들의 왕성한 저술활동을 낳기도 했다.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단순 자료의 배열이나 시대 열거가 아니라 시대별 특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중세’는 단순히 근대와 고대를 잇는 중간대의 시대가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세속화된 정치권력이 부상하지 않던 시대, 혹은 종교가 정치권력을 대체한 시대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반면, 근대를 특징짓는 것은 변화와 진보의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탄생은 앞서 말한 대로 18세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럽 계몽주의의 탄생은 과거로부터 당대의 시대상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몰두했다. 이 몰두 속에 근대, 진보, 문명 등 그 이전과는 다른 개념들의 쓰임새가 생겨났고, 그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언어가 됐다. 개념사는 달리 보면, 인간의 사고의 역사기도 하다. 그 역사의 결정적인 단절은 흥미롭게도 18세기로부터 시작됐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