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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서 삶과 생명이 홍련암 아래 부서져 날아오르는 물방울과 같다는 말을 했다. 오늘 글은 그 다음에 또 느껴서 새기게 된 내용이다.
역시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사람이 망하고 나면 찾는 이가 없기 마련이고 스스로 사람을 피하게도 된다. 시간은 절로 남아돈다.
시간이 남아돌면 무료해진다. 이에 나는 스케치 북과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훌쩍 집을 나서는 일이 잦았고, 목적지는 주로 산사였다.
찾아간 날은 이른 봄날의 평일이라 객방을 혼자 쓸 수 있었고, 공양주 보살 아주머니에게 몇 푼 더 쥐어주면 대접도 괜찮다.
절 경내에 매화가 아직 피고 있었다. 그 절은 그 이전 해 그 무렵에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다시 그 매화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어스름 녘 방안에 앉아 봄 노을빛을 즐길 겸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다가 인사말을 건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또 뵙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잠시 혼동 또는 착각이 몰려왔다. 방도 작년의 그 방, 매화도 작년의 그 매화, 나도 작년의 나, 날씨 또한 작년 그 날씨였다. 분명 한 해가 흘렀건만 별반 차이가 없으니 그 사이에 과연 시간과 세월이 흐르긴 흘렀는가 싶었다.
흔히 흘러가버리는 시간이란 말을 한다. 세월은 유수와 같고 쏜 화살과도 같다는 말. 이런 생각은 비단 우리 문화권만이 아니라 동서양 공히 가지고 있다.
멀리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 가깝게는 20세기 초 영국의 천문학자 아더 헤딩턴이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해 시간의 화살표란 문학적 표현을 제시했던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세월은 가고 오지 않는 그 무엇으로 흔히 여겨진다.
이와 같은 시간의 비가역성 또는 비대칭성, 시간은 오로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를 뿐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생각은 서구의 기독교가 무력해지면서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생각, 영생에 관한 신화가 깨어지고 나니 어처구니없이 흘러가버리는 무상하고 덧없는 시간 앞의 삶이란 생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고갱이 타이티 섬에서 그린 대작에 대해 붙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그림의 노랗고 푸른 색감이 주는 묘한 정감보다도 질문의 메시지로 인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가 가진 시간에 대한 관념 역시 흘러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무엇일 뿐이었고 따라서 내 삶 역시 그 시간의 물결 위에 혹은 속에 함께 묻혀서 쓸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영락한 입장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이른 봄날 저녁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붉었던 그 매화꽃은 작년의 매화꽃이었고 나 역시 작년의 나와 전혀 다르지가 않았다. 그러니 흘러가는 세월이란 생각에 대해 어떤 의문이 생겨날 법도 했다.
그 순간 나는 과거로 되돌아와 있다는 생각, 동시에 현재에도 있으며 어쩌면 이 자체가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간이란 것은 사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사물과 일의 변화를 설명해주는 유력하고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의 문제가 있다. 어제의 홍안이 오늘의 백발이란 말처럼 우리들은 시간 속에서 느끼는 비애라든가 덧없음을 느낀다는 점이니 이건 또 다른 문제라 하겠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대 초반의 그 절 마당에서 내가 보았던 시간은 되돌아 와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시간은 되돌아오고 있었다. 봄을 지나 여름, 여름을 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지나더니 또 다시 봄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한 번 머물다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소식 없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매정한 당신이 아닐 수 있다는 말.
그저 내가 늙어가고 또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져갈 뿐이지 시간 그 자체는 멀리 떠나가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그 무엇이란 생각을 그때 그 절 객방에서 하게 되었다.
시간은 존재와 일의 변화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개념이란 생각, 그리고 시간은 천문학자에게 있어 객관적으로 파악이 되는 하나의 물리량이란 생각, 유한한 생명임을 자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선 떠나면 다시 볼 수 없는 무정한 당신이란 생각, 그리고 시간은 갔다가 되돌아오는 그 무엇이란 생각 등이 얽히고 설키고 있었다.
그날 밤 객사 바깥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불규칙하고 연고 없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시간의 ‘있음’을 느껴야 했고 그 바람에 밤늦은 시각까지 시간이란 놈을 놓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절에서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그 절에서 ‘되돌아오는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나는 이미 1982년부터 운의 순환에 대해 기존의 운명학과는 전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연구를 해왔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운이란 돌고 돌아 결국 되돌아오는 것이란 점에 대해 직관적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되돌아오는 시간’이란 문장을 인터넷에 들어가 한글로 또 영어로 쳐서 검색해보았다. 그 결과 우연히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쓴 ‘영원회귀의 신화’란 책을 찾을 수 있었고 마침 번역판도 나와 있어 고마웠다.
사서 읽어보니 사실 내가 느꼈던 되돌아오는 시간의 생각과 엘리아데의 생각은 약간 다른 점이 있긴 했으나 근본적으론 같은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아데의 주장으로부터 보다 풍부한 것들을 발견하고 흡수할 수 있었다.
그 절을 다녀온 이후 나는 시간의 회귀성, 시간은 되돌아오는 연어와 같다는 생각을 중심에 놓고 운명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갈 수 있었다.
특히 핵심 가설로 설정했던 발상은 해마다 시간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되돌아오는 것이니 계절의 변화, 즉 자연이 계절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늘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저 모습 속에 운명의 이치와 비밀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해마다 변해가는 계절의 모습을 최대한 집중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이전엔 그냥 무심히 넘겼던 많은 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 직관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계절의 변화를 통해 실로 엄청난 것들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으며 그것을 통해 내가 ‘자연순환운명학’이라 이름을 붙인 이론의 중추가 되는 하부 이론들을 다듬어낼 수 있었다.
‘절기론’이라 내가 부르는 것이 그것인 바, 이는 기본적으로 자연의 24절기 변화가 60년에 걸쳐 변화해가는 사람의 일 속에서 그 사람의 절기에 맞춰 고스란히 투영되고 반영된다는 것이 골자이다.
물론 60년의 순환만이 아니라 60개월 그리고 60일 단위의 순환 속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사실도 그 이후 오랜 연구와 검증 끝에 마침내 확인하고 이론화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엘리아데가 남긴 책 역시 모조리 찾아서 읽었고 때론 애매한 글을 만나게 되면 영문판을 주문해서 확인해보기도 했다.
늘 그렇지만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의 경우 그 저자와 직접 대면해서 얘기해 보고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엘리아데는 이미 1986년에 죽었다. 만나서 내가 연구해낸 자연순환운명학에 대해 얘기를 들려 줄 수 있었다면 무척이나 흥미로워했을 터인데 하는 공상도 해본다.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크레슈티에서 태어난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생일을 보면 1907년 3월 13일이고 생시를 찾아보니 오전 5시로 되어있다.
정미년 계묘월 신유일 경인시가 된다. 1921년과 1981년이 입춘 바닥이고 1951년이 입추였다.
그의 책 영원회귀의 신화, 불어 원제는 Le Mythe de l'éternel retour는 1949년에 출간되었는데, 1951년이 그의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추였으니 한여름인 대서에 나온 책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얘기하면 되돌아오는 시간을 중심으로 연구해낸 내 이론은 엘리아데의 영원회귀와 니체의 영겁회귀에 관한 사상 양쪽 모두와 맥이 닿아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운의 좋음과 나쁨을 얘기하는 것일 뿐, 실은 그 어떤 운도 저 나름으로 즐길 구석이 있기에 어떤 운에서도 초연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은 정확하게 니체의 사상이기도 하다.
김태규의 희희락락호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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