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역사의 대립을 통한 과거극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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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과거 ‘청산’에서 애도로…과거 상기를 통한 의미 재확인·재해석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12-02 16:28:31

90년대 초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에서 크게 불거진 논의가 바로 ‘과거청산’이다. 군부정권이 마감되며 과거는 새로운 의미부여 대상으로 떠올랐다 할 수 있다.

1980년의 광주는 그 대표적 사례였다. 광주는 폭동의 장소였을까 봉기의 장소였을까. 그도 아니면 학살의 장소였을까. 이 개념들을 선택하는 작업 자체가 매우 정치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청산’의 대상은 분명 ‘군부’ 독재였고 과거의 기억작업은 이 청산작업의 정치적 정당성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비슷한 류의 논의가 전후에 지속됐다. 나치치하에서 학살된 유태인의 존재는 독일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1945년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독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무고함을, 즉 자신들이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에 바빴다.

독일의 과거극복 작업은 이러한 책임의 회피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를 전후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기 위한 다채로운 학문적, 예술적 노력이 병행됐다. 저자 전진성은 독일의 과거극복(Vergangenheitsbewältigung) 개념에 주목하여 이 문제에 접근한다.

청산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기되어야 할 과거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의 잊힌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이는 곧 과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집단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출발점 중 하나는 ‘기억’과 ‘역사’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근대에 있어서 역사의 개념은 거대담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세기에 그것은 혁명운동의 이론적 바탕으로 추앙받기도 했으나, 이후 국가에 의해 상당 부분 관제화 되기도 한다.

역사는 지식의 형태를 취하고 제도교육을 통해 전 국민에게 전파된다.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말해줄 거대한 사건이나 구조가 존재한다고 가정되고 그 사건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 하나의 연속성 속에서 의미부여 되기도 한다.

반면 이에 대립하는 기억의 개념을 특징짓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체험이며, 지식이 아니라 개념화되지 못한 이미지들이다. 예컨대 나치의 유대인 학살 경험이 그러하다. 수백만 혹은 수십만의 유대인이 학살되고 다수의 독일인들이 그를 묵인했을 때, 이제 그 죽음을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기억작업과 애도

여기서 기억의 윤리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유태인의 죽음에 대해 ‘가해자’ 독일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억은 기본적으로 이 가해자의 책임성을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독일인들이 택한 것은 과거극복이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난다. 군부를 ‘청산’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았던 1990년대 한국 사회는 과거청산 작업 이후에도 수많은 죽음과 불행을 목도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과거는 결코 청산되지 않는다는 것. 과거는 끊임없는 상기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그 의미를 재확인-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비의 의미는 독일인들이 과거에 가해자였고, 현재에도 언제든지 가해자의 지위에 놓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같은 물음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우리의 아이의 죽음은 왜 일어났을까, 19세의 고교실습생은 왜 불의의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혹은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이 사회의 어떤 근본적인 문제들에 잇닿아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눈앞의 죽음을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구조의 결과물로 보게 만든다.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 진정한 기억작업과 애도의 의미가 있다. 과거의 극복은 언제나 불완전하기에 결코 청산될 수 없다. 기억작업은 곧 죽음의 현재적 의미가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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