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폭력에서 해방의 신적 폭력으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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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발터 벤야민 <폭력 비판을 위하여>

폭력 개념의 철학적 복잡성을 이해하는 단편 에세이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2-10 17:42:45

독일어에서 ‘Gewalt’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먼저 이 단어는 ‘폭력’으로 번역되곤 한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나 체계를 파괴하는 어떤 힘을 지칭한다.

다른 한편으로 Gewalt는 기존 것의 파괴가 아니라 어떤 강제적 힘의 집행을 뜻하기도 한다. 예컨대 경찰이 범법자들을 연행하거나 시위를 진압하는 행위를 Gewalt로 묘사하기도 한다.

사실 철학적 화두에서 폭력은 파괴나 강제력 이상의 어떤 창조적 힘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Gewalt를 새로운 질서 생성의 힘으로 간주한 19세기의 사상가 중 한 명이 프리드리히 엥겔스다. 19세기 말 이후 수많은 사회분쟁과 노동자 운동의 부흥 속에서 터져 나온 사회혁명과 봉기들은 구체제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거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발터 벤야민이 살던 20세기 초는 특히 세계대전과 사회혁명이 곳곳에서 폭발하던 때였다. 1920년대 초 벤야민은 거대한 전 세계적 동요의 한복판에서 폭력의 의미를 사고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가장 근원으로 꿈틀대는 힘들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었다.

법제정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먼저 국가에서 경찰의 역할을 떠올려 보자. 경찰이 집행하는 강제력은 기존 질서의 수호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경찰의 이 집행력을 통상적인 한국어적 의미에서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이 Gewalt의 또 다른 의미, 즉 강제력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벤야민은 이러한 질서보존형의 강제력을 법보존적 폭력이라고 불렀다. 법보존적 폭력에 대비되는 폭력의 다른 양상은 단연 법제정적 폭력이다. 법의 보전과 충돌하는 것은 법파괴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적으로 파괴의 행위는 또 다른 질서 형성의 길을 여는 과정이기도 했다.

법제정적 폭력은 이렇듯 기존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 혹은 법체계의 수립을 수반하는 폭력을 뜻한다. 20세기 초 유럽의 노동자운동은 거대한 혁명적 힘으로 꿈틀댔고, 벤야민은 이 혁명적 힘이 새로운 질서와 법의 공간을 열어젖히리라 기대했다.

법보존적 폭력이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의 강제력이라면 법제정적 폭력은 창조적 힘이자 새로움의 구축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적 폭력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다. 전자는 기성 질서의 지속만을 추구하기에 어떠한 새로움과 창조성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는 역사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피를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거대한 해방을 수반하기도 한다.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

여기에서 이 창조적 폭력의 이중적 구조를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벤야민 이후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오늘날의 신화’로 묘사한 바 있다. 신화란 무엇인가. 이때의 신화란 신적 이미지를 통해 과거를 단순히 미화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대한 미화는 항상 현재적 필요를 통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단군신화는 한반도의 단일민족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창조된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민족’이라고 부르는 혈통적, 영토적 공동체 단위들은 대체로 19세기를 전후로 하여 날조된 발명품이라는 것이 수많은 연구들에 의해 폭로됐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당연시되곤 하는 여러 이데올로기들은 실상 우리의 현실을 왜곡하기 위해 기능하는 신화적 스토리텔링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의 신화적 폭력이란 이런 의미에서 신화적 왜곡을 수반하는 폭력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누군가의 피를 부르되 그 피의 근원을 망각에 빠트리는 어떤 폭력이 태초에 존재한다. 그 폭력은 우리가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무의식적으로 규정하고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근원에서부터 규정한다.

반대로 신화적 폭력하에서 태동한 질서가 체제유지의 임계점에 다다를 때 거대한 사회적 봉기나 혁명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대혼란이 어디로 귀결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예컨대 그 혼란은 다시 또 다른 내용의 신화적 폭력을 수반하며 억압적인 새로운 질서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나 벤야민 시대의 수많은 사회적 저항운동들처럼 혼란은 억압을 넘어 새로운 해방의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벤야민은 이를 신적 폭력이라고 명명했다. 신화적 이미지로 망각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신이 태초에 세계를 구축하듯 억압되고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는 어떤 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

20세기 초 세계대전과 혁명의 거대한 소용돌이는 분명 폭력의 복합적 함의를 물음에 부쳤을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 세계에서 다시 폭력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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