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몰락하고 새로움은 오지 않은 시대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고태경의 인문 책방…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현대사회를 특징지은 자유주의 이후 어떤 정치가 오는가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2-24 22:46:32

공론장은 흔히 수많은 이념 간 쟁론의 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세기 이후는 이른바 ‘XX주의’ 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혁명 후 공화주의가, 19세기를 전후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나타났고 왕정복고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재등장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그리고 오늘날 거의 모든 체제들이 스스로를 민주주의 체제로 명명하고 있다.

민주주의나 공화주의는 하나의 체제라기보다 가치지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완전한 민주주의란 실재하지 않겠지만 모든 체제는 명목상으로는 이념상으로든 항상 민주화의 가치를 옹호한다. 반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로 가면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자유주의자인가 아닌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프랑스혁명 후 형성된 모든 근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로 수렴된다고 가정한다. 왜 그런 것일까. 자유주의에 반대한 여타의 보수적 정치 패러다임이 존재하고 혁명을 옹호한 급진주의 운동들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자유주의의 한 파생물에 불과하다.

세 개의 이념

근대 정치 패러다임의 출발점이 된 것은 프랑스혁명이다. 그런데 대혁명 당시 세계관을 나누던 것은 구체제 옹호자인가 아닌가의 이분법에 가까웠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구체제를 옹호하던 보수주의자들이 한편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한편에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혁명 과정에서 다시 수많은 논쟁을 수반했다. 1789년의 대혁명은 그 미세한 시발점이었고 논쟁의 불씨는 1830년대를 관통하며 크게 점화됐다. 1789년 당시 구체제에 저항했던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이 1830년 왕정복고기에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면서 자유주의 내 급진파들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들 역시 이제는 단순한 구체제 옹호의 형태를 넘어서 근대 민주주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1830년의 프랑스 왕정복고에서 1848년 혁명까지의 시기는 이념이 분화되는 일종의 이행기 성격을 띠었다. 분화의 갈래는 1840년대에 오면서 격화됐고 1848년 혁명을 맞이하며 급진파 일부가 사회주의 운동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보수주의가, 왼쪽에는 사회주의 급진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매 순간의 정세 속에서 온건파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거나 적대했다. 세 개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의 정치 패러다임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근대 정치이념의 모호함과 자유주의 이후

19세기의 논쟁은 20세기로 오며 역시 반복됐다. 이 세 이념들의 구분 점은 사실상 모호했고, 각각은 항상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과 적대를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존재했다. 프랑스혁명 후 정치질서는 항상 변동한다는 것, 정치적 격변과 변혁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주어진 질서는 항상 변화의 힘에 노출돼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정치적 스펙트럼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강한 견인력을 갖고 퍼져나갔던 이유다. 예컨대 프랑스혁명을 통해 인권선언이 이루어졌지만 19세기를 관통하며 프랑스 및 유럽사회의 인권은 빈곤과 계급 간 갈등 등의 사회문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동요했다.

엘리트들은 기층의 대중을 ‘위험계급’으로 분류했고 체제갈등은 대혁명 후 오히려 더 가속화됐다. 이를 왼쪽으로 견인하며 대중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사회주의였고 오른쪽으로 견인하며 엘리트들을 통해 대중을 훈육하고자 한 것이 보수주의였다.

자유주의는 이 둘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 세 이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모두 국가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다시 이것이 지난 두 세기 이념 간 권력투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됐다. 이 세 이념은 시민사회의 민주적 질서를 옹호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항상 국가권력을 강력하게 열망했다.

그런데 문제는 두 세기 간의 갈등이 이제 거의 종지부를 찍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중의 불신에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은 세 이념들이 강력하게 추구했던 국가권력 그 자체다. 1968년의 혁명은 관료제적 틀에 구속된 근대 국가제도에 대한 강력한 불신의 표출이었다.

이 불신은 냉전의 다른 한 축인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1989년에 한 번 더 폭발한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한 시대패러다임의 종언을 시사한다고 간주한다. 요컨대 자유주의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무엇이 올까. 오늘날 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만연하다. 확실한 것은 낡은 것이 사라진 자리에 아직 새것이 도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