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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정치를 상실한 동물,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인간을 말하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5-05 19:25:35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흥미로운 개념적 대립쌍을 발견한다. 조에(zoe)와 비오스(bios). 모두 우리말로 생명을 뜻하는 이 단어들이 어떻게 의미상의 대립쌍을 형성한다는 것일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라틴어 번역으로 인해 후대에 ‘사회적 동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의 본래 의미는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다. 고대 그리스의 인간들은 광장에 나와 토론하면서 비로소 공적 인간 즉 정치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이 정치적 동물의 함의에 가까운 것은 비오스다. 정치적 생명 혹은 정치적 삶을 뜻하는 (경향이 있는) 비오스와 달리 조에는 ‘공적인 무엇’이 아닌 단순한 생명 그 자체를 지칭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아감벤은 왜 비오스와 조에 즉 ‘정치적 생명’과 ‘생명 그 자체’를 구분하고자 했을까.

민주주의의 이율배반

사실상 정치적 존재와 생명 그 자체를 구분하는 것은 아감벤의 틀은 아니다. 오히려 서구 정치사상의 오랜 역사가 이러한 이항대립 위에 구축돼 있다. 근대 계몽사상의 선구자였던 루소는 이렇게 물은 바 있다. ‘(주권자로서의) 인민은 어떻게 인민이 되는가.’ 이 물음의 함의는 단순하다. 살아 숨 쉬고 뼈와 살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주권자의 능력을 갖진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겪으며 주권자가 되는가.

주권자가 되지 못한 단순한 생명 그 자체와 주권자가 된 정치적 존재의 이항대립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근대 정치사상에까지 이렇듯 기본전제처럼 작용해 왔다. 아감벤의 특징적인 요소는 이 이항대립을 뒤틀었다는 점이다.

근대 민주주의란 모든 이들이 보편적 인권을 갖는다는 전제하에 성립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민주공화국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여타의 수많은 문명권들에서 야만적인 폭력이 발생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정치제도의 발전에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독일은 어떨까. 1930~40년대 독일은 20세기 비극의 상징이라 할 만한 나치체제의 등장을 경험했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아무 죄 없이 대량학살됐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상징인 미국은 20세기 최대의 학살국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체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대량학살의 계기를 통해 구축됐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그 자신을 부정하는 어떤 폭력적 상태를 내포한다.

서구 정치의 이율배반과 생명 그 자체

요컨대 아감벤에 따르면 나치와 20세기의 대량학살들은 결코 근대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발생한 우연적 사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죽음들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원적 폭력으로 기능한다.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루소로 돌아가 보자.

루소는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때 앞의 ‘인민’은 그냥 살덩어리로서의 인간 생명체를 뜻하고, 뒤의 ‘인민’은 정치적 의식을 갖는 존재를 의미한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적 존재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를 정치적 존재가 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아감벤은 근대 정치사상에서 논란을 키워온 ‘예외’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법의 일상적 작동과 지배 상태가 ‘상례’라면, 법이 중단되고 비상사태가 발동하여 살육과 탈법적 폭력이 지배되는 국면을 ‘예외’상태라고 부른다. 상례는 법치의 상태이고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소환하지만, 예외는 법을 중단시킨 상태다. 법의 중단과 함께 인간을 공적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순간이다.

법과 정치적 영역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는 시민이 되지 못한 인간에게 인권은 존재하지 않음을 폭로한 바 있다. 한 국가의 시민권을 갖지 못한 난민들의 죽음에 대해 법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난민과 전쟁 희생자들은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경험하고 있으나 결코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을 주장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공적 영역으로부터 박탈된 존재들의 죽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감벤은 신화적 상상이 소환해온 성스러운 것과 불결한 것 간의 구분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신성함과 불결함의 양가적 가치를 갖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인간의 정치적 생명 역시 같은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법의 보호를 받는 인간은 동시에 법의 중단과 함께 공적 존재 자체를 박탈당하는 존재들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마치 하나의 몸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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