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이 휩쓴 도시…시대의 몰락과 도덕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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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신의 죽음을 목도한 19세기 러시아의 빈궁…<레미제라블>과 같은 시기 발표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7-07 23:06:49

작품은 1866~1867년대에 발표됐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이 발표된 시기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거의 같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즉 ‘빈궁한 자’의 존재가 유럽의 사회적 화두로 부상한 것은 정확히 1800년대 초중반의 일이었다.

가난한 장발장이 빵을 훔치며 법적 제재를 받듯,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에게서도 화두는 역시 빈궁의 문제였다. 가난한 대도시의 법대생 라스콜니코프는 빈궁한 삶을 지탱하고자 고리대금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가난한 이들 앞에 오만한 고리대금업자에 분노해 살해를 감행하게 된다.

벌레 같은 존재를 죽였을 뿐인데…

“죄라고? 무슨 죄? ... 저 추잡하고 해로운 벌레를,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니 마흔 가지 죄악은 용서받을 텐데,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그런데 왜 다들 사방에서 나에게 '죄야, 죄!'하며 손가락질을 하느냐 말이야”

앞서 말했듯, ‘빈곤’은 19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새로운 화두 중 하나였다. 보통 ‘사회문제’라는 이름으로 총칭된 이 갈등의 문제는 당대인들에게 무엇이 ‘죄’이고, 어디까지가 ‘정의’인지를 묻게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고리대금업은 얼마나 약한 자들을 괴립히는 것인가, 왜 그의 살해가 저 괴롭힘의 행위보다 더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 작품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정의의 문제가 봉착한 이러한 혼란을 직접 체현한 이였다. 법학도라는 신분은 ‘죄’의 함의를 스스로 물음에 부치도록 했고, 살인은 빈궁이라는 사회 전체가 응답해야 할 총체적 화두에 연결돼 있었다.

19세기 유럽의 시대정신을 구축한 것이 프랑스혁명이었듯, 라스콜니코프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들의 출현에 큰 감화를 받았다. 시대의 혼란기에는 작은 오점에 동요하지 않고, 거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나약한 범인(凡人)의 평범성이 아니라 영웅적 결단이. 노파를 죽인 것은 작은 죄겠지만, 그로 인해 이 세계의 피를 빨아먹는 벌레 같은 존재들을 박멸한다면 이보다 더 영웅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신은 죽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를 휩쓴 빈궁의 사회문제는 지식인들의 사고에 차가운 냉소를 불러왔다. 따라서 19세기 중반임에도 라스콜니코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세기말적인 허무주의의 감성이었다.

모든 허무주의가 그러하듯, 시대에 대한 불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확장됐다. 연인의 관계로 추후 발전하는 소냐를 향해 라스콜니코프는 하느님의 부재에 대해 말한 후 절을 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는 당신에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고통 앞에 절을 한 거야.”

‘인류’라는 보편적 존재와 직접 마주하는 것은 보통의 신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영웅이 모든 혼란을 잠재우며 메시아처럼 인류 앞에 도래할 수도 있다. 메시아는 어떤 절박한 상황,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다. 빈궁이 모두의 보편적 화두가 된 시대에 어떻게 신이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이 죽었기에 영웅이 필요하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는 살해를 통해 그러한 영웅이 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왜 영웅이 되기 위해 살해가 필요했던 것일까. 살해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폭력의 극단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감행하고 싶었고 그래서 죽였어... 그저 감행하고 싶었을 따름이야, 소냐.”

감행의 다른 말은 결단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새로운 제국의 시대를 연 것처럼 자신 역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 결단을 내리고자 했다. 물론, 이 결단은 매우 극단적이고 따라서 어떤 협상이나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혼란의 시대는 폭력의 이러한 극단성을 수반한다. 그리고 시대는 이 극단의 선택지들 사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라스콜니코프의 화두는 그런 점에서 매우 근본적이다. 분명 살해는 나쁘다. 그러나 과연 타인의 빈곤을 착취하는 이들의 존재는 나쁘지 않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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