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정치경제학, 이젠 노동문제 답해야”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고태경 인문책방

인문학 키워드 _ 경제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10-13 12:39:48

경제의 어원인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는 원래 가족의 살림살이를 뜻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18세기를 전후로 하여 폴리티컬(political)이라는 수식어가 결합하며 ‘정치경제학’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말은 가정의 살림살이를 폴리티컬하게, 즉 국가적으로 확대한 것을 의미한다.

동물적 생존과 오이코스의 확장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어에서 생명 혹은 삶을 뜻하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능하다. 하나는 조에(zoe), 다른 하나는 비오스(bios).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며 이 같은 부류의 두 단어가 하나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조에)을, 다른 하나는 ‘정치공동체적 삶’(비오스)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인간은 동물적 생존을 해야 하는 생물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치공동체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둘은 철저히 분리되었는데, 잘 알려졌다시피 조에, 즉 가족의 살림살이는 여성과 노예의 몫이었고, 비오스, 즉 폴리스에서의 삶은 남성 시민들의 몫이었다.

생물학적 생명활동은 동물적 차원의 것으로 간주되었고, 정치공동체는 그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요컨대, 인간은 정치공동체라는 상징적이고 가치지향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남성 시민들은 아고라에 모여 폴리스의 운영과 인간존재에 대한 ‘고차원적’ 물음들을 주고받았다.

반면, 생존의 문제는 어떠한가. 생존의 활동으로 간주된 노동(labor/ponos/Arbeit/travail)의 고대 어원들의 일반적인 의미는 빈곤과 연결되거나, 무시당하는 것 혹은 버려지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것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비오스는 이 열등함을 넘어서는 무엇이어야 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며 이러한 구분법에 혼동이 왔다. 먼저 생산력 자체가 서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이제 사람들은 상품을 발명하고 무역과 시장교환으로 이 상품들을 원거리로 보내기 시작한다.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된 노동과 상품시장은 인간의 관계망을 거대하게 확대했다. 그리고 이 확대는 동시에 생물학적 생존의 공간 자체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들고 다니는 대부분의 것들은 시장교환을 통해 획득한 것들이고,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온 것들이다. 생존과 인간생명체의 유지는 가족의 영역을 넘어섰고, 오이코스는 전 사회적 범위로 확장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유토피아

또한 근대 경제의 탄생은 세계관의 변화와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서구인들은 신대륙의 발견 이후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의 거대한 변화를 경험했다. 한편으로 이제 지역공동체를 넘어 무한한 유사-기하학적 세계가 열렸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세계는 기하학의 공간처럼 무한하고 인간존재는 그 무한한 세계 한복판에 고독하게 던져져 있다는 상상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유사-기하학(혹은 물리학)적 공간은 상품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의 공간을 닮았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생각의 극점을 찍은 것은 경제의 순환을 신체 신진대사 법칙에 유비한 중농주의의 등장이었다. 중농주의로 번역되는 영어 Physiocracy는 원래 농업의 중요성이 아니라 자연(Physio-)의 법칙이 지배(-cracy)하는 세상을 뜻하는 것이었다.

18세기에 부상한 이 학설은 경제가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상품과 화폐가 마치 자연의 신진대사 모델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특별한 저항이 없다면 인간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가설이다.

사회문제의 등장

그리고 한 세기가 채 지나기 전에 거대한 동요가 유럽을 뒤덮었다. 빈곤과 노동의 화두가 1840년대를 전후로 유럽사회를 흔들었고, 이것은 1848년 유럽의 거대한 혁명으로 연결되었다.

오이코스의 전 사회적 확장은 생각보다 자연법칙의 아름다운 순환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빈곤과 버려짐 혹은 비참 등을 함축했던 ‘노동’은 수세기를 지나 산업혁명을 거친 뒤에도 그 기존 의미를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식이 달랐던 듯하다. 경제 혹은 정치경제학은 이제 노동의 문제에 응답할 수 있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경제의 책임을 진 주체들의 보이는 노력에 의해 경제는 일정하게 통제되고 분배될 필요가 생겨났다.

19세기의 노동문제는 ‘사회문제’라는 이름으로 공론화되었는데, 이는 달리 표현하면 사회가 답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20세기 세계대전을 거친 후 일단락되었지만, 최근에 다시 세계경제 불황의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