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이민, 국민·민족 범주 새로운 도전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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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 인문책방

인문학 키워드 _ 국민/민족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10-28 20:20:37

“20세기의 세계대전이 이례적이었던 것은 그 전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도록 한 전례 없는 규모 때문이 아니다. 그 이례성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내려놓도록 설득되었다는 데 있다.”(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중에서)

우리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말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작 그 수많은 죽음들 중 일부가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던지겠다는 결의 속에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익숙지 않다.

앤더슨의 위와 같은 말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것이 세상과의 인연을 끝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때로 자기 목숨을 희생했던 것일까.

인간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동물이다. 20세기 세계대전에서 많은 이들은 ‘민족’ 혹은 ‘국가’라는 이미지적 실체를 향해 자기 목숨을 던졌다. 영어의 nation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온전히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민족 혹은 국민 혹은 국가와 같은 어떤 이미지적 실체의 신비함이 존재한다.

단어의 의미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4강 진출은 2002년 여름 한국사회를 들썩였다. 그런데 물어보자. 돈도 밥도 명예도 나오지 않는 축구팀 4강 진출에 왜 사람들은 그렇게 난리가 났던 것일까. 직접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선수들에 감정을 이입하는 모습들, 혹은 열광적인 응원을 통해 응원하는 ‘우리’가 하나임을 느끼는 감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nation’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20세기 들어 많은 학자들이 민족/국민이라는 실체에 대해 연구했다. 먼저 몇 가지의 전제들을 되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민족/국민은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 국가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오늘날의 국가는 역사적으로 존재하던 여타의 국가들과는 다른 형태를 갖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특정 왕조의 국가도(조선왕조 등), 특정 인종의 국가도 아니다(다인종 국가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우리말로 민족 혹은 국민으로 번역되는 영어 nation은 어원적으로 원래 ‘태어나다’(nation)라는 뜻을 갖고 있다. 중세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국가나 국민 단위가 아니라 그냥 출생지, 즉 고향을 의미할 뿐이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단위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세기를 전후로 하여 갑자기 근대국가 건설의 요구와 함께 정치적 색채를 띠며 새로운 문명국가의 주체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둘째, 같은 단어 안에서도 뉘앙스에 따라 의미의 갈래가 다시 나뉘기 시작한다. 한국어에서 민족이라는 단어 앞에 자주 들어오는 수식어가 바로 ‘단일’이다. ‘단일민족’이라 함은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주체라는 뜻으로, 의복습관과 언어, 예절 등의 습속 등을 통해 만들어진 통일된 준-혈족 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편의상 nation의 정치적 특성이 반영된 것을 우리말로 ‘국민’이라고 하고,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것을 ‘민족’이라고 부르자.

상상 속 공동체의 탄생

엄격히 말해, 한민족, 혹은 겨레 등과 같은 단어로 명명가능한 문화적 집단의 범위를 특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다인종 국가 등에서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민족’이라고 명명가능한 문화적 단위는 근대문명의 요구에 의해 사후적으로 발명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 근대 문명의 핵심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신문 등의 인쇄매체다. 쉽게 생각해 보자. ‘민족/국민’이라는 것은 각 동네나 마을의 좁은 공동체를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리적 만남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다 거대한 것이어야 하고, 다른 민족(‘외세’)의 침탈을 이겨낼 부강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인쇄매체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이들을 상호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기능했다. 신문은 얼굴을 모르는 이들에게 발생한 일들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민적 화두로 부각시켜 전달했고, 소설 등은 민족적 현실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를 고민케 했다.

2002년 월드컵을 TV로 보면서 ‘국민’의 일체감을 느끼듯, 그 커뮤니케이션의 상상적 효과는 강력한 것이었다(때로 스스로의 목숨을 던질 만큼). 국민은 정치적 실체여야 했기에 부강해야 했는데, 그러한 점에서 ‘국민’의 이미지는 문명의 건설 혹은 국가발전의 요구를 항상 수반했으며, 많은 경우 독재 권력 등에 의해 억압적으로 활용되곤 했다.

물론, 민족의 문화적 특성들 중 일부는 실제로 근대 이전부터 계승된 것들일 것이고, 일제 식민지기의 사례처럼 억압적 통치에 저항하는 감성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근대국가 건설의 과정 속에서 미디어의 매개를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상상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상상물인 만큼 그 시효 역시 한시적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난민의 이슈가, 전 지구적으로는 이민의 이슈가 새롭게 부상하는 지금 시대는 이 민족/국민의 범주들이 새로운 도전에 빠진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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