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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하고 부흥군의 중심이었던 임존성과 주유성이 함락됨으로써 백제라는 이름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자신들의 조국 멸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천하의 역적들이 있었으니, 단연 으뜸은 의자왕을 체포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바친 웅진성주 예식진(禰寔進)일 것이다.
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만고역적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 615~682)으로, 당나라로 귀순해서는 조국 백제의 부흥군을 와해시키는데 앞장선 장본인이다. 또 하나의 배신자는 바로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부흥군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흑치상지이다.
660년 7월 백제의 도성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의자왕과 태자 효는 웅진으로 피신했다가 성주 예식진의 배반으로 사로잡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함께 항복했던 부여융은 의자왕이 낙양으로 압송될 때 동행했다가 바로 당나라에 귀순해 창고 등을 관장하는 종3품 사가경(司稼卿) 벼슬을 제수 받는다.
백제왕으로 추대되어 왜에서 귀국한 부여풍이 부흥군의 실권자 부여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있었음에도 부흥군의 공세가 날로 거세지자 당나라 웅진도독은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이에 부여융은 유인궤 등과 군량을 실은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다가 왜군과 4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왜선 400척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고는 육군과 합류해 함께 주류성을 공격했다.
당나라 황제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된 부여융은 부흥군 장수들에게 은밀히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유혹했다. “부여풍은 잔인하고 의심이 많아 자신을 옹립해준 부여복신을 죽였다. 다른 장수인들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당나라는 처음부터 백제의 영토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백제가 고구려와 손잡은 게 미워서 신라와 더불어 쳤을 뿐이다. 지금 부여융은 선왕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대세를 잘 아는데다가 당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다”
“당나라가 그에게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을 동원해 그를 호위하고 귀국하도록 하노니, 백제의 총명한 군사들이여! 짐의 말을 믿고 부여융을 왕으로 받든다면 전쟁의 고통 없이 옛 나라를 회복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군에 저항한다면 짐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잔인한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한 탓에 패배하면 대군에게 살육을 당할 것이고, 승리하면 부여풍의 의심을 사서 복신처럼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이 어찌 지혜로운 자의 선택이 될 수 있으랴”
이에 지수신은 “우리가 상좌평 복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하려 했지만, 중도에 불행히도 간신들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의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좌평이 의병을 제창한 것은 당나라를 쫓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상좌평의 죽음이 애통하다고 해서 그것을 복수하고자 당나라에 투항한다면, 이것은 상좌평만 배신하는 게 아니라 백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좌평의 혼령이 계신다면, 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손바닥을 꿰이거나 독약을 마시는 것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나는 공이 마음을 바꾸고 제자리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답변했다.
흑치상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나당연합군의 선두에 서서 5만 병력을 거느리고 주류성을 포위해 함락시키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세간에서는 흑치상지의 이러한 역적행위에 대해 ‘어쩔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는 동정어린 평가도 있으나, 이에 반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아! 백제 중흥의 대업을 창피하게 만든 자는 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다. 그는 중흥하는 백제를 멸한 제1의 죄인이었다. 비록 부여풍이 죄인이기는 하지만, 흑치상지는 부여풍이 악하다는 이유로 조국을 배반하고 당나라의 노예가 되었으니 백제를 망친 제2의 죄인이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그저 <당서>의 평가에 따라 흑치상지를 찬미했으니, 이 어찌 미친 자들의 붓장난이 아니겠는가”
백제부흥이 완전 종식된 뒤,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충성맹세를 했다. 664년 부여융이 웅진도독에 임명되어 백제 땅으로 올 때 흑치상지도 다른 백제인들과 함께 돌아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군장이 되었다. 훗날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소멸되자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돌아가 토번(吐蕃,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데 큰 무공을 세워 이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정2품 상주국(上柱國) 벼슬에까지 오른다.
이렇듯 부여융은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에게 빌붙어 조국의 부흥을 저지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강전투에서 당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수훈을 세우고, 백제 복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흑치상지를 회유해 전향시킴으로써 백제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만고의 역적이다. 현재 부여시는 이런 부여융의 가묘를 만들어 그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지난날 백제의 전 임금은 거스를 것과 따를 것을 분간하지 못해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고 인척간에도 화목하지 못했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해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해 고을을 약탈하고 성을 도륙해 거의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시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셨다”
“백제는 지리의 험준함과 길이 먼 것을 믿고서 천자의 가르침을 업신여겼으므로, 황제께서 크게 노하셔서 삼가 죄를 묻고 정벌을 단행했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나가는 곳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평정되었다. 그러한즉 마땅히 궁전을 늪으로 만들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후세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들에게 교훈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유순한 자는 받아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사책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고 옛 땅을 보전하도록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 영원히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각기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풀어버리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여, 각자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당의 번국(蕃國)으로써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 유인원을 보내 친히 권유하고 천자의 뜻을 자세히 선포하노라”
“두 나라는 혼인으로 약속을 맺고 맹세로 거듭했으며 희생을 잡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서, 언제까지나 함께 화목하여 재난을 서로 나누고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도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한 뒤에는 모두 함께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뜻을 달리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살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리셔서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지고 남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금가루로 쓴 증표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감히 어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천지신명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어 흠향하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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