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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들어 이례적인 저물가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4개월 연속 수출까지 내리막길을 타면서 전반적인 경기침체 국면이 이어지고 있어 디플레이션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자칫 공황으로 연결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상황 중 가장 공포스러운 시그널이다.
한국은행은 이에 대해 하반기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설사 저물가 상황이 개선된다고 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친다. 근본적인 문제는 경기불황 국면의 지속이라는데 있다. 대부분 경제지표를 보면 비상 사이렌이 울리는 위기의 경제상황이 호전될 국면이 없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이나 스태그플레이션 모두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독약이다.
올들어 3개월 간 물가상승률은 0%대를 지속하면서 통산 평균 0.4% 오르는데 그쳐 지난 1965년 통계작성 후 무려 반세기가 넘는 54년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물가가 낮으면 일부 장점도 없지 않지만 경기불황과 맞물리면 최악의 경우 파산 도미노 현상인 시장의 붕괴로 이어진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핵심 기둥인 일자리, 투자, 수출 모두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일자리와 투자는 바닥권으로 떨어진지 오래됐고 그나마 버텨주었던 수출은 올들어 지속적으로 하락국면이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달만 해도 수출 증가율이 전년 동기 보다 무려 8.2% 떨어져 작년 12월 마이너스 1.2%를 보인 이후 올 1월 -5.8%, 2월 -11.1% 등으로 추세하락을 이어왔다.
그나마 경상수지는 82개월 흑자를 계속했지만 2월의 상품수지 흑자규모가 4년 7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해 빛이 바랬다. 더욱이 수입이 동반 하락하면서 낸 불황형 흑자라는 점에서 향후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잔뜩 낀 상황을 연출했다. 급기야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우리나라 수출 증가율이 0.7%에 그쳐 사실상 답보상태에 머물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도 올해 상품수출이 1.2% 감소할 것이라며 우울한 전망을 보탰다.
한국경제의 불안 요인은 30대 대기업의 작년 성적표를 보면 추가로 확인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이들 대기업의 매출 증가율이 4.1%에 머물러 전년 9.3%에 비하면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내실을 따져보면 더욱 심각하다. 영업이익 증가율이 14.5%에 그쳐 전년의 90.6%에 비하면 1/6 수준이다. 순이익 증가율은 117.9%에서 아예 마이너스 6.2%로 돌아서 충격을 주었다.
국정운영 씽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우리 경제상황에 대해 작년 8월 개선, 10월 정체, 11월 둔화 등으로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제기한 끝에 이달 7일에는 끝내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전망인 ‘부진’으로 진단했다.
이 정도 상황이면 한국경제는 벼랑 끝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행 발 화폐개혁론이 나오고 일부에서 동조분위기가 일고 있어 우려감을 준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국회 업무보고에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개혁)을 전격 언급했다.
이 총재는 지금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여건이 갖춰져 있다는 입장까지 나아갔다. 그는 애써 원론적이라고 에두른 표현을 했지만 누가 봐도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강한 의지를 읽게 했다. 한국은행이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독립기관의 지위를 갖고 있지만 권력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해 온 그간의 행태를 보면 행정부와 교감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청와대는 리디노미네이션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면서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과연 한은 총재 독자적으로 화폐개혁 화두를 꺼내들 수 있을지 강한 의문이 남는다. 화폐개혁이 특급 보안작전 속에 전광석화처럼 시행돼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한은 총재의 발언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화폐개혁의 장점이 물론 여러 가지 있다. 엄청난 규모의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규모가 커진데 따른 경재운용상 많은 불편들을 해소할 기반도 마련된다. 하지만 과연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적기인지는 분명히 따져봐야 한다.
화폐개혁에 따른 원론적인 긍정요인만으로 여건이 갖춰졌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판단이다. 우리 경제가 지금 디플레이션이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은 리디노미네이션 적기가 아니다. 화폐개혁을 통해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은 지나친 환상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한다.
통상 거론되는 100대 1의 비율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하게 되면 화폐단위가 줄어드는데 따라 경제운용 뿐만 아니라 국민 실생활 측면에서 편리성이 제고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음지의 경제를 일거에 일소할 수 있는 효과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기업들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더욱 인색해지고 부동산 시장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요동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일각에서는 중소·중견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까지 화폐개혁에 대비한 다양한 환금성 자산 확보에 들어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 수단을 통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거액의 자금을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보폭을 넓혀 축적해야 한다는 이야기들까지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개인들도 환금성 자산 확보라는 쏠림현상에 대거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그 방점에 부동산이 꼽힌다.
이로 인해 심리적으로 거품경제가 확산될 개연성이 크다. 이는 일시적으로 경기부양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겠지만 말 그대로 쭉정이에 불과한 버블현상이다. 경제전반이 더 위축되고 생산성과 효율이 떨어지는데다 거품성장에 따른 착시효과까지 주면 한국경제는 뿌리부터 썩어도 눈치를 못 챌 수 있다.
전미경제분석국(NBER)은 최근 화폐개혁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논문을 하나 냈다. 논문은 인도의 사례를 들면서 ‘예상치 못한 충격’을 적시했다. 우리도 원론적 수준의 긍정적 요인만을 기대하고 섣불리 화폐개혁을 단행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터질 우려가 많다.
우리는 지난 1952년과 1962년 화폐개혁을 단행한 경험이 있기는 하다. 이후 한국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진 만큼 리디노미네이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지난 2002년 박승 전 한은 총재도 당위성을 주장한 일이 있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규모가 커진 요인 그 자체 때문에 신중해야 할 사안이다. 우리 경제의 성장엔진이자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경우의 수가 매우 많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화폐개혁론이 대두되는 배경에 경제적 접근 보다는 권력 차원의 헤게모니 목적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심지어 북한 경제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서라는 추측까지 제기되고 있는 마당이다. 결국 기업이나 시장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부작용을 만들 토양이자 환경이다.
1700조에 달하는 사상최대의 막대한 국가부채와 1500조를 넘어 선 천문학적 가계부채에 국가 재정도 올해는 물론 내년까지 연이은 슈퍼예산을 편성해야 할 상황이다. 빚쟁이 국가에 빚쟁이 국민들이 470조에 이은 500조원 이르는 막대한 세 부담까지 짊어져 허리가 휘고 쓰러질 지경이다. 서민들은 소득이 오히려 줄어든 가운데 장기불황까지 덮쳤다. 한 마디로 우리경제는 지금 중환자라는 처지임을 감안한다면 화폐개혁이란 수술보다는 내실을 다지기 위한 절대안정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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