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필립스 엑시터는 왜 토론에 집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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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란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것

이정일 필진페이지 + 입력 2019-06-22 09:53:32

토론의 기본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지식이 없는 선함은 약하고 선하지 않은 지식은 위험하다.” 졸업생의 30퍼센트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는 미국 최고 명문 고교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Philips Exeter Academy)의 교훈이다. 이 교훈은 1781년 존 필립스 박사가 건학 이념으로 삼은 이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한다. 학교 곳곳엔 라틴어로 ‘Nib Sibi’라고 쓰여 있는데, 뜻은 ‘자신만을 위하지 않는’ 이다. 그래선지 교사들은 “항상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타적 인재가 되라”고 가르친다.

바로 이타적인 생활은 토론으로 답을 찾는 교육과정에도 나타난다. 필립스 엑시터에선 토론할 땐 에드워드 하크네스(Edward Harkness)라는 방식을 따른다. 이 방식은 12명의 학생들과 교사가 타원형 테이블에 앉아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한다. 이 수업에선 질문은 있지만 정답은 없다. 온갖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토론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진리를 탐구하며 지성은 물론이고 존중과 배려를 배워나간다.

토론이란 하나의 주제를 찬반으로 나누어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토론의 기본은 배려다. 논리의 허점을 공격하거나 엉뚱한 질문을 무시하거나, 말꼬리를 잡거나,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은 토론이 아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말 몇 마디만 섞어도 알 수 있다. 토론에선 배려, 존중과 협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일례로 교사와 학생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을 벌인다.

토론이란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것

진리를 지키려면 진리를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미 정답을 정해놓고 그것을 알아맞히게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웬만한 지식쯤은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정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토론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제는 가르치는 것(teaching)이 아니라 인도하는 것(leading)에 힘써야 한다. 강의가 아니라 질문으로 토론을 유도해야 한다. 토론을 하면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교실에서 금세 탈피할 수 있다.

토론을 시작하면 두 가지를 알게 된다. 하나는 인간이 ‘독특한’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가 아닌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다르게 생각하고, 또 다르게 산다. 하지만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토론이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을 통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다. 기본 규칙만 지키면 토론은 생각과 삶을 가꾸고 사고와 관점의 지평을 넓히는 창(創)의 도구가 된다.

세종의 즉위 첫 마디, ‘의논하자’

즉위 후 왕이 한 첫 발언은 상징성이 크다. 즉위 후 정조의 첫 발언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슬픔의 고백이자, 아버지가 추구하던 길을 가겠다는 선포였다. 반면 세종이 한 첫 마디는 ‘의논하자.’ 다른 말로 하면, ‘토론하자’였다. 1418년 8월 12일 도승지 하연에게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임무를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이것이 세종의 첫 발언이었다. 집현전이 했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경연(經筵)이다. 왕과 함께 학문적 토론을 하고 정책자문을 한다. 세종은 형식적이었던 경연을 국정토론의 장으로 바꾸었다. 태조 때 23회, 정종과 태종 때 36회, 80회이던 경연을, 세종은 무려 1,898회 열었다. 월 평균 6.7회였다. 이 압도적인 숫자가 세종이 토론에 임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세종의 토론에 임할 때도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세종이 내세운 제1원칙은 충분한 토론과 전적인 일임이다. 충분한 찬반토론을 거쳐 경우의 수를 모두 따져본 뒤, 그 일을 주관할 사람에게 일임한다. 제2원칙은 토론 중 좋은 의견이 나오면, “황희 말대로 하라” 혹은 “허조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라”처럼, 바로 실무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반면 세종은 회의 때 형식적으로 참여하거나 지식자랑을 하거나 어떤 사안에 무조건 찬성하거나 감정대립을 하면 이를 지적했다.

세종이 정한 회의규칙이 정리되어 있는데, 놀랍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땅에 엎드리지 말고 곧은 자세로 회의에 임하며, 국왕의 잘잘못을 모두 직언하며, 긴급사안 시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고, 소수의 의견도 끝까지 경청하되,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게다가 세종은 좋은 의견이 나오면 힘을 실어주고 정책화했다. 세종은 지혜로운 왕이었음에 분명하다. 세종은 토론의 군주였다. 군사, 과학, 언어, 의학 등에서 이룬 세종의 찬란한 업적은 토론을 통해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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