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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21>

일본에 벼농사, 금속문화 전래한 삼한과 왜(倭)

조문시대(繩文時代) 수렵생활, 농사는 언제부터 했나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7-13 09:44:23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조문시대(繩文時代) 일본인의 생활은 수 천년동안 사냥과 식물수집으로 살았을 뿐, 농경(農耕)을 하던 종족은 아니었는데 서기전 3세기경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서기 57년의 중국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는 왜()100여 개의 부족집단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북부에서 나타난 논농사법과 금속지식을 지닌 다른 종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왜인(倭人)을 밀어내고 그 땅에 정착하였는데 그들의 두개골은 우리와 유사하다고 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이 부여 기마족(騎馬族)으로 가야(伽倻)에 있던 선비족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상가야인(上伽倻人)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처음으로 말을 왜() 땅에 가지고 간 종족으로 안휘성(安徽省)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가야인(伽倻人)으로 많은 가야인들이 남부 평야지대로 이주해서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농부였다고 한다.
 
이들은 엄청난 학식과 신기술을 가지고 이주해 왔는데 그 시기는 고분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 새로운 이주자(移住者)들은 집단정착지(集團定着地)를 이루고 군림(君臨)했으며 본래 정주(定住)하고 있던 왜인(倭人)들은 피 지배계층()支配階層)이 되었다.
 
이 당시 대륙의 정세를 보면 서기전 1500년 경, 은왕조(殷王朝)시대는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였다. 서기전 6~5세기인 춘추시대말기(春秋時代末期)에는 철기문화(鐵器文化)가 발생한 시기이고 서기전 3~2세기는 기마민족이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하는 시기이기였다.
 
또한 진()과 한()도 이때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영향을 받아 철기(鐵器)와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익히게 되고 이 기마전술로 광대(廣大)한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왜()는 당시 원시생활을 하던 터라 가야 기마민족을 대항할 수도 없었다. 이후 가야(伽倻)의 기마족(騎馬族)에 의해 왜()라는 국가를 세우고 수도경작(水稻耕作)과 토기(土器)와 금속기(金屬器)의 전래(傳來)로 이 이기(利器)를 사용함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후 빈부(貧富)의 차가 발생하고, 청동기(靑銅器)와 철제(鐵製)의 농구(農具)사용으로 수도경작(水稻耕作)도 금속기(金屬器)도 다양하게 보기(寶器), 제기(祭器)가 실용화 되면서 철기(鐵器)가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일본약사(日本略史)일본에 농사와 금속문화(金屬文化)가 들어온 것이 서기전 9세기였다고 한 것은 500년을 앞당겨 쓴 것이다.
 
이 시기 일본열도(日本列島)는 조문시대(繩文時代)로 원시생활을 면치 못한 구석기 조문시대(器繩文時代)여서 철()로 된 창칼이나 농기구(農器具)도 국가(國家)나 정부조직(政府組織)도 없었다. 일본외무성(日本外務省)의 이런 역사왜곡된 기술(記述)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以上은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287~300면을 참조 인용하다.)
 
오늘은 일본의 고대 역사기록을 보며 고대 문화와 벼농사(農事) 금속기(金屬器)문화가 우리가 전래한 것임은 물론 왜()의 원시상태가 어떠했는지 등을 사서기록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왜()의 기록과 일본 역사
 
▲삼국지 후한서에 나타난 왜
 
중국의 사서인 한서(漢書)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3세기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하면 왜()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 내전상태(內戰狀態)의 혼란한 권력투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권력투쟁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한 사서(史書)가 볼 수 없음에서 상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를 알려고 하면 왜인(倭人)’ 또는 ()’의 위치를 찾으면 알 수 있다. 왜인(倭人) 또는 왜()는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삼국지(三國志) () 30’에는 후한(後漢) 때 공손강(公孫康)이 요동군 일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 대방(帶方)은 서기 300년에 우리의 서신라(西新羅)인 사로신라(斯盧新羅)에 항복하고 서기 474년 백제 개로왕(蓋鹵王)때 백제 땅이 된다. 이 대방(帶方)의 남쪽에 고구려·백제·신라·가야(伽倻)가 있고,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왜()가 있는 것이다. 대륙의 가장 남쪽에 있다.
 
이 왜()는 회계(會稽태현(台縣이주(夷洲단주(澶洲주애(朱崖담이(儋耳)가 있는 곳인 것이다. 그리고 왜인(倭人)은 소강(小康)의 후예(後裔)이고 소강(小康)의 후예(後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있는 곳이 회계(會稽)가 있는 곳으로 양자강 이남의 지명(地名)들이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25()’의 사실들을 말하면 의아해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필자가 우리 역사가 반도의 역사가 아니고 대륙의 역사라고 하면 의아해 하는데 너무 우리역사를 모르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교재의 내용은 잘못돼 있다.
 
분명한 것은 왜()도 회계(會稽주애(朱崖담이(儋耳)는 양자강 이남이고 이곳이 왜() 땅이고 남월(南越)과 진번(眞番)도 중국 귀주성에 있었다. 이러한 것을 숨기려고 송()나라 때 소정파가 그린 우적도(禹跡圖)에 타이완(臺灣)을 빼었다. 그러나 남월과 진번은 이웃하여 있다.
 
지금은 남월(南越)의 흔적은 월성령이고 진번(眞番)의 흔적은 예파()이다. 우적도(禹跡圖) 에서 진번(眞番)의 위치는 조선의 서쪽에 대한 분명한 경계를 나타낸다. 진장성 기록에서 안문 즉, 태행산맥 동쪽이 조선(朝鮮)이었고 기자(箕子)에 의하여 서화(西華)를 포함한 동쪽이 조선이었고 진번군에 의하여 귀주성 동쪽이 조선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가 동이전에 기록된 이유는 왜()의 지명으로 담이·주애·회계·단주·이주가 모두 진번군의 동쪽에 있으니 왜()는 조선의 일부이고, 기준의 한 일부임으로 왜()가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것이다. 왜인(倭人) 역시 조선인과 다른 것이 아니다. 조선인의 일부인 것이다.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3세기경 왜()의 상태를 보면 무녀(巫女) 히미코(卑彌呼)를 왕으로 하는 사마태국(邪馬台國)과 구노국(狗奴國)은 한()78제후국의 하나였다. 이 제후국이 왜국(倭國)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후예이고 우리와 밀접한 연결이 있으며 다른 민족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조상을 가진 족속이며 백제가 어려웠을 때 백제를 도와 백강전투(白江(戰鬪)에 연합함대를 이루어 싸운 사이이다. 이 역사도 우리역상에 편입되어야 함에도 명나라는 1403년 우리의 왜인전을 일본열도를 일본으로 부르게 하면서 일본에 넘긴 결과 하나로 되지 못 했다.
원래의 일본은 타이완(臺灣)이었다.
 
이미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타이완은 대만(臺灣)의 발음이다. 대만을 태만(台灣)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이것은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이()를 태()로 표기하고 태()는 대()로 표기(表記)하였으며 다시 대()는 대()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왜인전(倭人傳)에 관계된 지명으로 회계(會稽이주(夷洲단주(澶洲주애(朱崖담이(儋耳)가 있는데 회계(會稽)는 절강성, 담이(儋耳)는 귀주성, 주애(朱崖)는 해남도, 단주(澶洲)는 항주 입구 바다이다. 그리고 이주(夷洲)는 대만(臺灣)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일반적인 도서(島嶼)에는 대만(臺灣)1600년 이전은 모른다고 한 것도 있고 한()나라 때부터 알고 있다고도 하였다. 현재 대만에 사는 이들도 이런 역사를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명()나라 때 주영(周嬰 1426~1522)의 동번기(東蕃記)태원(台員)’으로 나온 것이 최초라고 하며 이것이 이주민(移住民)에 의해 대만(臺灣)을 타이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1544년 대만해협을 지나는 포로투칼의 일야 포르모사라 하여 유럽인들이 타이완을 포르모사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있으나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역사자료실에 의하면 대만은 이주(夷洲)라고 명기하고 있는데 이주(夷洲)는 후한서부터 왜()의 이주(夷洲)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열도에서 이주(夷洲)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왜()가 양자강 이남에서 있으면서 대만(臺灣)을 다스렸다는 기록인 것이다. 이는 왜()가 당()과 사로신라에 의해 본거지에서 축출(逐出)되며 대만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주(夷洲)에서 일본을 재건하고 본국탈환의 꿈을 키우며 진출을 시도 하였으나 사로신라의 장보고에 의하여 봉쇄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륙에서 일본을 건국한 왜인(倭人)들은 본토 수복을 위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279년 원나라 정벌 때부터 명나라 때 까지 본토회복을 반복 시도하며 사로신라와 원(), ()나라 때까지 본토회복을 반복 시도하며 사로신라와 원(), ()의 동해안에 출몰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마저 잃어버리자 개척지인 유구열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앙정부가 없던 일본열도로 완전히 이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처음부터 일본열도에서 생성한 것 같이 역사를 엮어 놓고 있다. 이는 허구이고 왜곡일 뿐이다.
 
이후 타이완(臺灣)은 네덜란드가 1624년 남서안(南西岸)에 침입하여 안평(대남)에 젤렌디아스(Zeelandia)성을 쌓고 대남시에 프로바덴시아 성을, 북부 기륭에 트리니다드 성()을 구축하고 있던 스페인에 대하여 공격하여 1642년에 네덜란드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명()나라 유신 정성공이 1661년 건너와 대륙회복을 꿈꾸었으나, 1662년 그가 사망으로 332년 만에 청나라에 굴복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의 역사와 이를 이은 일본역사(日本歷史)가 일본역사로 잘못 인식되어 대만역사가 1600년 이전이 없었던 것처럼 비치게 되었다. 이는 우리의 발해사(渤海史)처럼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지판구(Zipangu)라고 소개된 부분이 바로 타이완에 있던 일본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왜인(倭人)들의 역사이지 일본열도의 역사가 아니다. 이를 혼동하여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허구의 역사밖에 아니 된다.
 
일본열도에 있는 동일본(東日本)과 대륙의 왜();일본(日本)은 구별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며 지금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歷史記錄)은 제대로 된 것이 없기에 제대로 연구하고 경계(警戒)해야 함이 바로 이런데 있는 것임을 유의(留意)하며 연구를 해야 함이 요구되고 있다. (以上吳在成, ‘九黎系 倭-日本史’ 4~30參照하고 本文引用 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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