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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수많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만나고 환도산성에 오르다

국내성으로 수도 천명하며 만들어진 산성…중국 역사 왜곡 흔적 다수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9-16 17:54:33

▲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전편에 이어) 어제는 1500년 전 고도인 국내성의 유적에 마음이 홀렸다. 이곳이 두 번째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로 배웠다. 그러나 최근에 장수왕이 천도한 수도가 대동강의 평야이 아닌 요하 부근의 요양설과 산서성의 임분설이 제기됐다. 사실 3세기나 만주대륙을 제패한 강국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국내성은 좁은 지역이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이 왜곡됐다면 저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도 옮겨왔다 말인가. 모를 일이다.  
 
여하튼 오늘은 퉁구하 부근의 산성자 고분군과 환도산성을 답사하는 날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빈관 마당에서는 젊은 남녀 당원들끼리 춤을 배우기가 한창이다. 중구에서는 종종 보는 광경이다. 
 
우리는 통구하 옆에 난 갈을 따라가면서 환도산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타나는 민가들에는 고구려 때의 창고 양식인 2층 다락 형태의 부경(桴京)이 간혹 보이기도 했다. 통구하에 흐르는 물의 양은 많지 않지만 맑고 푸르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서기 2년인 유리왕 21년에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평지성인 국내성을 쌓았고 전시에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으로 2.5km 떨어진 해발 676m 환도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산성 서북쪽은 가파른 산능선이고, 남쪽에 통구하가 흐르며, 남문만 방어만 하면 되는 난공불락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성벽 둘레는 약 7km, 동쪽 성벽 높이는 처음 이름은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불렸다. 환도산성은 동천왕 18년(244년)과 고국원왕 12년(342년)에 관구검과 모용황의 침입을 받은 바가 있으며, 이 때 피난 수도의 역할을 했다고 했다. 
 
통구하의 다리를 건너니 오른편에 유명한 산성자 고분군이 보인다. 왼편으로 제법 올라가니 환도산성 표지석이 나타났다. 사람 키만큼 자란 옥수수와 콩밭으로 변한 모습에서 이천 년 전의 환도산성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500 미터 위의 밭둑에 기와 조각이 지천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궁궐터로 추측되기도 했다. 
 
아래 부분에 못이 나타났다. 기록에는 서북쪽 모퉁이와 동쪽 산기슭에 못이 있다고 했는데 아마 동쪽의 음마지(飮馬池)로 보인다. 연화지(蓮花池)라고도 하는 이 못은 양어지(養魚池)라고도 불린다. 그 연유는 한나라 군대가 침입해 환도산성을 포위하자 잉어작전을 구사해 한나라 군대를 물리친 데에서 비롯됐다. 고구려의 높은 산성에는 일반적으로 못이 있는데 이를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환도산성을 그 후 세 번째 답사하였는데 이 못이 없어지고 주차장으로 변해있었다. 고구려 고분 등 유적자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2003년경 환도산성을 발굴하면서 한나라와 역사적 사건이 얽힌 이 못을 없애버렸다. 중국 당국은 이 때부터 고구려의 역사적 자취와 흔적을 지우는 모습이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중국의 역사왜곡이 동북공정을 거쳐 문헌상의 왜곡단계에서 유적지 왜곡단계로 접어 들었던 것이다.
 
음마지의 서쪽에는 산성의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의 둥근 축대 모습이 보인다. 이 장대도 무너진 상태였지만 그 위용은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 후 발굴한 궁궐터는 2400평의 규모로 계단식의 서향임이 밝혀졌다. 제사용의 팔각형 건물터 2개가 발견됐다. 우리는 황폐해진 환도산성을 내려와 동쪽에 인접한 산성자고분군으로 갔다.
 
통구고분군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고분군은 고구려시기 6대 고분군의 하나다. 총 1582기의 고분이 우산북록(禹山北麓)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남쪽과 통구하(通溝河) 사이에 펼쳐진 평탄한 계곡 위에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고분군을 이루는 고분의 유형은 봉토분류(封土墳類)와 석분류(石墳類)이며, 대형의 봉토석실묘 8기를 포함한 봉토분류가 1052기이며 나머지 530기는 석분계통다. 이 고분군에 속한 유명한 고분으로는 4세기 말~5세기 초에 세워진 절천정총(折天井塚), 적·흑·색으로 귀갑문양과 연화문양의 벽화가 발견된 귀갑총(龜甲塚), 5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산성하 1411호분은 우산하(禹山下) 1080호분과 함께 묘 위에 세워진 석비(石碑)로 인해 주목되는 고분이며, 석비는 8각뿔 형으로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산성하 1411호분은 외형은 봉토무덤인데 절두방추형을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큰 고분은 20여 기의 적석총인 반면 그 외 작은 봉토 무덤이 산재되어 있었다. 적석총의 기단의 한 면의 길이는 20미터 ~ 30미터 정도이고 높이는 5미터가 안됐다. 5층 기단이 남아있는 적석총에 올라가 보니 장군총의 형태와 흡사했다. 이들 적석총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 위용이 정말 장관이었음이 분명하다.
 
남아있는 적석총도 1층의 기단을 제외하면 파괴되어 돌무더기만 쌓은 형태다. 아마 통구하 고분군은 환인의 댐에 수몰된 고분군과 더불어 고구려 초기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이며 고구려를 지탱한 지배층의 사후 성지인 셈이다. 나는 남단의 적석총 무덤 옆에 묻힌 50미터 높이의 8각뿔형의 석비를 발견했다.
  
어제와 오늘 답사한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는 나에게 새로운 민족사의 역할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신라 중심의 사대주의적 역사체계를 불식하고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체계를 확장시킨 단재 신채호가 이 집안 지역을 답사한 감흥을 소개해야겠다.
  
단재는 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답사가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하였으며, 더구나 광개토대왕릉과 능비 및 만여 개의 고분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라 하면서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집안현을 한번 둘러 보는 것이 더 낫다‘고 단언했다.
  
나는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함으로써 단재의 말이 추호의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또한 우리 민족사의 올바른 흐름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의 벽화와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 내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민족사의 보고(寶庫)로 가득찬 이곳 집안현이 1900년대만 해도 우리의 땅이었는데 후손의 잘못으로 남의 땅이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아직도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이라고 믿는 자가 누구인가. 이 두 강은 나라 사이의 국경하천이 될 수 없는 지형적 특징을 두 눈으로 확인하라. 
  
우리는 다시 집안 시내로 가서 광복 후 북한에서 이 곳으로 넘어온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안을 방문한 인사들의 명함이 즐비했다. 이 식당이 매우 유명한 모양이다. 식사 후 국내성 유적지를 답사했는데 성곽의 북벽만 남아 있었으며, 국내성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성곽 내는 대부분 아파트가 세워져 있었다. 1930년대까지 국내성 성벽이 온전하였으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집안 박물관을 방문했다. 뜰에는 화강암의 각종 기단 등이 놓여있었으며, 크지 않는 전시실 입구부터 광개토대왕릉비의 웅장한 네 면의 탁본이 우리를 맞이해 준다. 천오백년이 넘은 세월인데도 능비의 웅혼한 서체는 조금도 그 기운을 잃지 않았다. 전시실 상단에 고구려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모두 걸려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박물관 옆의 기념품 파는 가게에서 광개토대왕비체를 연구한다는 진유국(秦維國)씨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가니, 은사이신 여초 김응현 선생으로부터 받은 행서 족자가 걸려 있었다. 자신이 광개토대왕릉비 서체를 연구한다고 하니 서예 대가인 여초선생이 보내준 것이라고 했다. 여초선생은 80년대 최초로 광개토대왕비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두 해 후 나는 진유국씨가 서울에서 금오와 서예전시회를 같이 연다는 소식을 듣고 재회하기도 했다. 이 때 나에게 서예 작품 대련을 선물하기도 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 압록강가로 차를 몰았으며, 압록강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고 사진도 찍었지만 우울해졌다. 어느 때 남북한이 통일을 해 잃어버린 간도 땅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니 앞길이 막연했다. 독일을 통일시킨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와 같은 인물이 후손 중에서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이어 오후 5시 경 집안 역에 도착해 김정남 기자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백두산을 다시 보기 위해 이도백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일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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