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타인의 마음으로 가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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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타인의 마음으로 가는 통로

감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이를 풀어낼 힘도 생긴다

이정일 필진페이지 + 입력 2019-10-28 10:56:39

TV 프로그램 중에 달인을 소개하는 프로가 있다. 어떤 기술을 20년 혹은 30년 정도 익히면 경지에 도달하는 듯하다. 이런 달인의 수련기간과 비교해보면 우리네 인생은 몇 배인데 인생 달인은 너무 적다. 위로가 되는 것은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다는 점이다. 간혹 인생이란 실타래를 잘 풀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다수는 여러 번 엉킨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한번 주어진 인생을 잘 살아내야 하지만 그것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잘 살려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중 하나가 문학이다. 문학은 돈이 되는 분야는 아니지만 우리가 항상 ‘나’라는 세계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도 들어가 보도록 한다. 소설은 이 땅에서 누군가로부터 강요받지 않는 세계 중 하나이다. 작가는 이 세계를 드나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낸다.

작가는 감성으로 삶을 일깨운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 문장을 통해서 독자 역시 그 자신의 숨겨진 생각과 감정을 읽는 법을 터득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드러내는 글은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작가 최은영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관계가 없을 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쉬운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녀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다보면 단편 ‘씬짜오, 신짜오’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에는 누가 떠나고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89)

또 다른 단편 ‘미카엘라’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p.238)

작가 최은영은 감성을 포착하고, 그 감성을 다시 문장으로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작가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품의 주인공을 영웅으로 세워 그들이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독자(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작품을 훌륭한 고전의 한 가지 조건으로 삼았다. 하지면 요즘 작가들은 대개 인생의 약자들에 관심을 갖는다. 치밀하게 얽힌 사회 속에서 어딘가 구멍이 생긴다면 이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감정은 기억에 남는다

아프리카 스와힐리 족의 속담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잊지 못한다”가 자주 회자된다. 아픈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 곁에 머문다. 삶의 미숙함으로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한다. 그것이 미숙함으로 끝나면 그나마 낫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면 그 여파가 크다. <82년생 김지영>이나 <내게 무해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상처를 받으면 더 세게 받아치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움츠려든다. 태연한 척해도 또다시 상처를 받기 싫어 겹겹의 장벽을 치기도 한다.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한 것인데, 그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소설은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 타인의 마음이 펼쳐져 있는 세계다. 타인의 삶을 읽어내는 따뜻한 문장은 우리의 마음에도 따뜻한 위로가 된다. 작가 최은영은 <쇼코의 미소>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갖고 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정일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