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억이 시작되는 가정은 삶을 지탱하는 힘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이정일의 문학푸드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고 가슴이다

이정일 필진페이지 + 입력 2019-11-10 11:49:43

일본 아오모리 현은 3세대, 70년 이상 계승되어온 대중식당에 백년식당이란 호칭을 준다. 한국에서 원조라는 말이 붙으면 전통의 맛을 오래 지켜온 식당의 이미지를 떠올리듯, 일본에선 백년식당에서 그런 성숙한 맛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곳에서 정성이 담긴 한 그릇을 먹는 느낌을 요리사 박찬일은 이렇게 표현한다.

한 입 베어 물면 한 시대가 입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만화가 허영만의 식객 1권에 70여년 된 ‘하동관’이란 식당의 이야기가 나온다. 곰탕 한 그릇을 먹으려고 지금도 사람들이 날달걀 하나를 손에 들고 줄을 선다. 쇠고기가 든 곰탕에 반찬은 깍두기밖에 없다. 그런데도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은 물론, 신세대들이 찾아온다. 그 비결을 한 가족 손님을 맞으며 주인이 말해준다.

보셨죠? 이렇듯 우리집은 3대, 4대가 다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 손에 이끌려 와서 곰탕 맛을 알게 되는 거죠.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또 가족들을 데리고 오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빌 클린턴이나 오바마 대통령은 패스트푸드를 즐겼다. 후일 대통령이 되었어도 그 맛을 찾곤 했다. 외국 순방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오면서 패스트푸드 점에 들려서 햄버거를 먹는다. 아동기의 입맛, 사춘기의 음악, 청년기의 가치관은 평생을 따라간다. 사회생활도 첫 직장의 경험이 남은 인생을 결정할 때가 많다.

기억의 힘

사실 집밥이 특별할 것도 없는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다. 맛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에서 시작한다. 맛은 기억이고 추억이다. 그래서 삶이 힘겨워지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맛을 찾게 된다. 땀 흘려 맛있게 먹고 나면 고단했던 일들이 힘겨웠던 일들이 견딜만해진다.

이런 모든 첫 단추가 꿰지는 곳이 가정이다. 하동관 주인의 말에서 식당을 가정으로, 곰탕을 부모의 사랑으로 바꾸면 강한 여운이 남는다. 자녀가 사물을 읽고 해석하는 모든 관점은 집에서부터 형성된다. 가정은 세계관의 산실이고 부모는 이곳에서 자녀의 기초체력을 길러준다. 가정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아들의 아버지

요즘 자녀들은 미디어, 연예인, 음악, 친구, 영화, 책 같은 다양한 매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배우기에 자신의 삶을 세워갈 가치들을 배울 시간이 부족하다. 자신의 자아가 어떠한지, 그 자아를 건강한 사회적 존재로 세워가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대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럼 아들의 아버지는 어떨까.

많은 아버지들은 직장생활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모녀의 유대는 그래도 깊어져서 의지가 되지만 부자 사이엔 모녀 같은 정서적 유대감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신적으론 어른이지만 노화도 진행되고 심리적 위기도 경험한다. 십대 이후 정신없이 살아오다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당황한다. 그래서 중년이 되어 뒤늦게 사춘기를 겪는다.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법도 배워야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건강, 친구를 적극적으로 챙긴다. 반면 남자들은 아내에게 심리적, 정신적으로 의존한다. 그래서 남을 배려하거나 자녀를 돌보는 법도 모른 채 나이가 든다. 자신의 경제적 역할이 다하는 순간 계륵 같은 존재로 변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에 실수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실수를 덜 하려면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이었던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가 해주시던 따스한 밥 한 그릇에 담겼던 사랑을 기억해낸다면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나아가서 가족 구성원과 타인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정일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