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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땅 간도대륙

민족 고대사 서술 단재 신채호와 리지린의 역사관에서 배워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4-15 17:17:16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최근 한국고대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학회에서 발간한 책에서 조인성은 자신들은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항변하면서 이미 조선시대 실학파 학자들이 평양 중심의 낙랑군설을 주장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조인성 국사교과서(고등학교)의 본문 및 연표에 고조선의 건국이 서기전 2333년을 서술한 것을 “황국사관에 따른 일본의 ‘국사’교육을 떠올리게 한다”면서 고조선의 건국기원의 부정으로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심지어 강단사학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단계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단재 신채호도 ‘기자동래설’을 주장했다는 등 단재의 역사관까지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 강단사학자들이 주장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비판이 필요하다.
 
조인성 외에도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우리학계의 주류인 그들이 주장하는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그들만의 주장이 아닌 ‘조선시대 실학파 학자들’들도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을 이미 주장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곤 하였다. 즉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보다 4세기 앞선 16세기에 먼저 조선시대에 나타났기 때문에, 주류사학계의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식민사학의 영양을 받지 않았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스승인 이병도, 신석호의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병도의 제자인 노태돈, 송호정의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땅위에서 솟은 것인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노태돈, 송호정의 제자들 역시 대를 이어 ‘평양 중심 낙랑군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날조된 ‘평양 중심 낙랑군설’과 관련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박사학위 주제가 조작된 허위이니 박사학위 역시 가짜인 셈이다. 이병도의 허위에 가득한 ‘평양 중심 낙랑군설’로 인해 젊은 청년 학도마저 가짜 박사에 평생토록 허위에 가득찬 인생을 살아갈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조인성 등의 논리는 가히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지식인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양 중심 낙랑군설’을 주장한 실학파 학자들’ 중의 시작은 한백겸이 지은 『동국지리설』이다. 『동국지리설』을 신채호는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삼한과 조선의 공개적인 분리론은 범엽(范曄)의 ‘동이열전’의 지리 설명으로 족하나, 조선 고대 3천년 간의 지리를 단정하여 「東國自古漢江以南爲三韓 漢江以北爲朝鮮 : 동국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으로 삼고 한강 이북을 조선으로 여겼다」이란 결론은 너무 ‘소경이 지팡이를 잃었듯이 맹장(猛杖)적’이고 무단적인 독단으로 한백겸이 ‘발조선, 발숙신, 부여조선, 예맥조선, 진국(辰國), 진국(震國), 진번조선, 진한(辰韓) 등의 동음이역(同音異譯)됨을 모르고 내린 대착오라 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한진서, 안정복의 강역론과 그 외의 조선 역사·지리를 논했던 이들 역시 한백겸의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안정복, 유득공, 이종휘, 한치윤이 지은 각 저서와 서거정 등이 지은 『동국통감』의 장단점을 비평하면서 대개가 정치사들이고 문화사에 상당한 저서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들의 정치사도 왕조의 흥망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로 삼았으며, 공구(孔丘)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최고의 법으로 알고 흉내 내어 임금을 존중하고 신하를 억누르기(존군억신;尊君抑臣)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었다. 또한 화하(華夏)족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려다(숭화양이:崇華攘夷)가 자국(自國)의 주권조차 거슬리는 올바르지 못한 논란이 있었으며, 외인(外人)들에게 아첨하기 위해 자국의 조그마한 강토마저 할양하려다 결국엔 建國의 도읍지까지 모르게 만들었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단재는 ‘역사를 아(我:주관적 위치에 선 자)와 비아(非我:주관적 위치에 서지 않은 자)의 투쟁이라 하였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본질은 아(我:주관적 위치에 선 자)의 역사가 아닌 비아(非我)인 일제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기에 당연히 비판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단재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짓다가 ’내란의 빈번함과 외구(外寇)의 출몰이 동국(東國)의 古史를 탕잔(蕩殘)케 하였음을 분개하여 비탄하였다. 그러나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外寇)의 병화(兵火)에서 보다. 조선사를 저술하던 사림들의 손에서 더 탕잔(蕩殘)되었다고 신채호는 주장하였다.
 
단재는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요, 환언하지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또는 변경하거나 고치려는(變改) 것이 아니다. 역사이래로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다면 그것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허구의 기자조선의 실체를 믿는 강단사학자들은 신채호가 기자동래를 믿었다고 기술하면서 자신의 기자동래설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과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서술한 ‘기자의 동래’ 부분을 어떻게 서술하였기에 이들의 주장이 엉뚱한 비약을 초래하였는지 분석해보자. 신채호는 “은(殷)의 왕자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상서』의 ‘홍범’이 곧 그것이라고 하였다. 신채호는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고 하였다. ‘기자조선’을 세워 왕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신채호는 “전사(前史)에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箕子의 王朝鮮」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 됨이 아니요, 서기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나니, 이제 사실(史實)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하노라”라고 하였다. 또한 역사이래로 각 역사책에는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분 아니라, 「三朝鮮」이란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3 왕대(王代)로 억해(臆解)하였다. 즉 「三朝鮮」은 「신(眞)조선 · 말(莫)조선 · 불(番)조선」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신채호가 기자의 조선 도망을 인정했지만 기자조선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三韓」은 「三朝鮮」을 분리 통치한 「三大王」이며, 三大 지방은 물론이며 三都의 위치와 강역의 범위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조선의 도읍지인 「아스라」는 지금 할얼빈(哈爾濱)이며, 범위는 길림성과 흑룡강섬 및 연해주 남단이다. 불조선의 도읍지인 「아리티」는 개평현 동북, 안시고허(安市古墟)이며, 범위는 요동반도(開原 이남, 興京 이서)이다. 말조선의 도읍지인 「펴라」는 지금 평양이며, 범위는 압록강 이남이라고 신채호는 주장하였다.
 
북한의 리지인도 가장 오랜 지리 서적인 『산해경』은 고조선의 위치를 조선반도 내에서 찾을 수 없으며, 발해 연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해준다고 하였다. 또한 리지린은 기자조선 전설을 비판하고 있다. 즉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기자조선 전설은 중국의 대국주의자들의 ‘조선은 서주 왕실의 한 후국이라’는 관념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전설은 고조선의 일부가 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이후에 날조되었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기자의 봉지(封地)가 조선이라는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따라서 기자와 고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리지린은 “중국 사가들이 ‘기자전설’에 근거하여 중국 사가들은 고조선을 서기전 12세기에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리지린은 ‘기자전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였으며, 여러 가지 자료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시기를 서기전 12세기(西周 초 시기)로 논단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기전 3세기 초까지 요동·요서지역에 걸쳐있었고 서변은 우북평 지역까지 이르렀다가 연(燕)에게 패전한 후 대릉하(패수) 이동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조선에 대한 저서로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이 1931년 이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며, 『조선상고사』는 1948년에 발간되었다. 신채호는 ‘지명이동설’과 함께 ‘단군-기자-위만조선’으로 연결되는 한반도 중심의 우리 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단군-부여-고구려’로 연결되는 만주-요동반도 중심의 역사체계로 전환시켰다. 북한 리지린은 『고조선연구』를 1960년대 초에 완성한 것으로 방대하게 집약된 기념비적인 저작이었다. 1962년에 『고조선연구』의 머리말을 쓰고, 1963년에 ‘과학원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고조선연구’에 대하여 신채호와 리지린의 저서가 선진연구로서의 자리를 매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주류사학계는 철저하게 외면한 채 오직 이병도의 왜곡된 이론만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구성하는 3대 원소는 시간, 장소, 사람 즉 「時 · 地 · 人」을 들고 있으며, 조선구사(朝鮮舊史)의 결점을 논하면서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어라”고 하였다. 역사 이외의 딴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갈파하였다.
 
리지린도 고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여, 중국 사가들의 왜곡되고 말살되어 남은 것이 보잘 것 없는 사료가 있을 뿐이며, 중국 사가들은 한족을 월등시하고 인접 종족들을 멸시하는 편협한 종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한족(漢族)과 이족(夷族)의 차별을 강조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기록할 때도 우리 민족의 고대사회가 그들의 한족의 고대사회보다 ‘열등’함을 논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서슴치않고 왜곡 말살하였으며 ‘정사(正史)일수록 그 정도는 심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 우리 역사의 주류 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잘못된 허구의 이론을 고수하기 위해 우리 고대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평양 중심 낙랑군설’이라는 허구의 이론을 제시한 이병도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노태돈과 노태돈의 제자인 송호정이 주장하고 있는 ‘평양 중심 낙랑군설’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문헌이 ‘역도원’이 오류를 범한 『水經註』의 「浿水條」의 기사이다.
 
『水經註』의 「浿水條」의 오류가 젊은 신진 학자들까지 오염시켜 ‘평양 중심 낙랑군설’이 재탄생되고 있는 현상이 씁쓸하기만 하다. 심지어 노태돈은 「浿水條」의 원문마저 변경시키며 자신의 논리인 ‘낙랑군이 평양 일대’임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며 거짓 논증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제 허위에 가득한 식민사학에 물든 주류사학계는 70여 년 동안의 잘못을 고백하는 양심선언을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선언한다.
 
 
 
[외부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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