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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생활명상 즐기기

‘내 마음’이 아니라 ‘내 욕심’이 아닐까

‘욕심’에 대한 균형잡힌 태도를 위하여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6-04 10:45:18

 
▲김성수 작가·마음과학연구소 대표
 쓰던 볼펜이 대형 소파와 소파 사이에 굴러 떨어졌다. 비좁은 공간이다보니 팔을 뻗어서 집으려 하는데 중지 끝머리에 닿을듯 말듯 잡히지 않는다. 넣었던 팔을 빼고, 굳은 허리를 토닥거린 다음, 숨을 깊이 내쉬면서 다시 집어넣었다. 겨우 볼펜을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넣어서 가까스로 들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손가락 사이에 껴있던 볼펜은 바닥에서 10센티도 올라오기 전에 미끄러져 다시 툭 떨어지고 만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굴러가기까지 해서 이제는 볼펜 머리 부분이 겨우 보이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뭐해?”
소파 사이에 팔을 집어넣은 채 내가 대답했다.
“볼펜 하나도 내 마음대로 안되네.”
그가 말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건가, 욕심대로 안 된다는 건가?”
“볼펜 한 자루 집어 올리는 게 무슨 욕심씩이나?”
“그렇게 용을 쓸 정도면 욕심 부리고 있는 거지, 뭐.”
나는 냉소를 입에 물었다. 볼펜 한 자루 들어올리는 걸 어찌 욕심이라고 할 일인가. 그저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일 뿐이지. 흔해 빠진 볼펜 한 자루잖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말이 기억 속에서 스물거린다. “그렇게 용을 쓸 정도면 욕심 부리고 있는 거지, 뭐” 정말 그런가? 한번쯤 정리해볼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처럼 ‘마음’이 아니고 ‘욕심’이나 ‘욕망’이 더 분명한 표현 아닐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이 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의해 그의 실존적 위치가 정해진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계급이나 경제적 수준과는 상관없이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 층위, 정확성, 조밀도 등에 따라 그의 실질적 삶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직원에게 쌍욕 섞인 막말이나 비하하는 표현을 남발하는 기업가의 실질적 존재 지점은 그 ‘막말이나 비하의 정신 영역 즈음’이라는 식이다.
 
욕심,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할 언어
 
당연히 ‘마음’과 ‘욕심’이라는 단어는 그 언어가 다른 만큼 인식이나 상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내 마음대로 할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과 ‘내 욕심대로 할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는? 같을 수 없다. ‘내 마음대로 할거야’에는 스스로에 대한 경계 의식보다는 뭔가 앞질러 가고자 하는 의지와 ‘지금의 생각에 대한 포괄적인 감성’이 엿보인다. 한마디로 ‘두루뭉술한’ 단어이다. 거기에 비해 ‘내 욕심대로 할 거야’는 반성적 관찰이 배치돼 있다. 즉, ‘앞질러 가고자 하는 의지’를 스스로 ‘욕심’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심리가 뭔가를 얻거나 움켜쥐는 상태임을 ‘인정’하고 있다.
 
‘마음’은 말 그대로 몸을 제외한 정신적인 모든 것이다. ‘마음’이라는 표현 안에는 사람의 ‘생각⋅감정⋅기억⋅상상⋅논리 등으로 표현되는 모든 정신적 행위들이 놓여 있다. ‘마음’이라는 표현 안에는 위에서 열거한 ‘생각⋅감정⋅기억 따위를 내려다보듯 하는 또 다른 층위의 마음도 있다. 그것을 ‘아는 마음’ 혹은 ‘보는 마음’ ‘상위 인지’라고도 한다. 이것을 기하학적 모형도로 표현하자면 끝없는 중층구조의 탑을 연상할 수 있다.
 
‘마음’은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하고 우주적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극단도 ‘마음’이라는 단어 하나에 포섭된다. 당신은 이렇게 ‘거대한 언어(?)’를 하루에도 수십번 씩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욕심’이라는 표현 또한 꽤 포괄적인 용어이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망’이나 ‘소원’도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욕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희망⋅소망⋅기원⋅욕구⋅욕심⋅욕망⋅갈망⋅탐욕’ 따위의 언어를 관통하는 정서는 무엇일까. 전깃줄 위에 나란히 앉은 새들처럼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일관된 심리 상태다. 유사 심리의 각기 다른 표현인 것이다. 원하는 것에 대해 움켜쥐는 악력(握力)이 단어마다 조금씩 다를 뿐이다.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보다 ‘내 욕심대로 할 거야’라고 하는 게 대체로 정직한 표현이다. ‘내 마음이 불편해’ 보다 ‘내 욕심이 불편해’가 더 직접적으로 속내를 드러낸다. ‘마음먹은 대로 살고 싶어’ 보다 솔직한 표현은 ‘욕심껏 살고 싶어’ 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는 말보다는 ‘욕심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가 더 진실 접촉면을 넓힌다. ‘솔직한 내 마음은 그만두고 싶어’가 아니라 ‘솔직한 내 욕심은 그만 두고 싶어’가 진심이기 십상이다.
 
‘마음’이라는 표현은 스스로 경계해야 할 때가 많다. ‘마음’이라는 표현 속에는 은근한 자기 변명이나 합리화·회피 따위를 버무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하다. 반면에 ‘욕심’이라는 표현을 쓰는 당신은 스스로 ‘인정’과 ‘수용’의 태도를 드러낸 셈이다. ‘욕구’나 ‘욕심’ ‘욕망’ 들은 그만큼 원초적이고 ‘나라는 존재’의 근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존재의 집’이 ‘욕망’을 기반으로 설계되고 건축됐음을 의식한다면 누군가와의 대화나 거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제 욕심입니다만, 제가 이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나 자신을 향해 즐거이 쓸만한 언어가 ‘욕심’뿐이랴. 희망·소망·욕망·갈망 등, ‘스스로 바라는 의도’를 표현하는 모든 언어들이 아닐까. 그것이 진실에 조금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 이 용어를 쓰는 것은 금물이다. 툭 던져 보면 안다. “그게 네 욕심이잖아!”와 “그게 네 마음이잖아!”의 차이가 보이는가. 사람은 자신의 내밀한 진실이나 상처가 들키는 것을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동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욕심’이라는 언어는 급소를 겨누는 공격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욕심’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할 언어’다. 그것도 자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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