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253>

예맥의 대륙천년 지배 비밀병기는 철, 기마군단이었다

지나(支那)가 예맥에 연전연패한 이유는 철과 전술 때문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5-21 13:30:43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 사가(史家)들과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우리가 약소국가라 기록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강대한 나라인 것은 지금 다 밝혀졌다.
 
이미 살펴본 예맥(銳麥;濊貊)은 3000년 전 구국(舊國)이라고 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동주시대부터 1000년간 대륙을 정벌 정복하고 지배한 것을 숨기고 덮으나 그렇다고 숨길 수도 덮을 수도 없다. 지나와 일본은 사서(史書)와 지명과 지도를 조작하며 예맥(銳麥;濊貊)과 낙랑국(樂浪國;1237년~서기 32년)을 지웠다.
 
그러나 예맥조선과 낙랑국을 숨기고 지우며 우리 역사를 반도(半島)에 가두며 왜곡해 당(唐)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대륙에서 밀어내려고 하지만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기 때문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가며 동북공정을 해도 소용없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세계 사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보여주듯이 동이민족은 5대 인류문명을 일으킨 자랑스러운 민족이며 상고시대부터 철(鐵)과 말(馬)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1000km 원격지(遠隔地)도 대군단(大軍團)을 이끌고 1주간이면 도달하는 기동력을 보였다.
 
이 기마군단은 반도에서가 아니라 대륙인 것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한고조(漢高祖)가 한나라를 세워 서기 전 200년에 예맥을 침범하였다가 참패하여 서기전 141년까지 60년간 예맥조선에 조공 바친 속국임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방(劉邦)은 예맥과 싸우면 연전연패를 했는가! 그 원인은 철과 철기와 기마군단의 전술도 한군(漢軍)은 예맥에 미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예맥은 3000년 전 부터 철기(鐵器)를 사용했다.
 
예맥에 굴욕적인 관계를 참아온 전한(前漢)의 무제(武帝)는 예맥의 비밀병기가 철에 있었기 때문에 서기전 500년경부터 철 생산을 시작한 진(秦) 때 제철(製鐵), 주철(鑄鐵)의 무기 개발로 예맥과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오늘은 연전연패를 하였던 무제가 예맥과 대등한 것 등을 살펴본다.
 
예맥과 한무제(漢武帝)의 오랜 전쟁 상황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35년, 조모(祖母)인 종태후(賨太后)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게 되어 예맥 정복에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기전 129년부터 매년 예맥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한무제는 황후의 이부형(異父兄)인 위청(衛靑;서기전?~106년)이 서기전 127년, 운중(雲中)으로부터 출진해서 예맥 루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을 붙잡고 나서 수천명을 죽이고 우양(牛羊) 백여만두(萬頭)를 얻어서 오르도스는 한(漢)의 삭방군(朔方郡)이 된다. 그해 겨울에 묵돌선우(冒頓單于)가 죽고 그 아우인 이치사선우(伊稚斜單于)가 예맥의 새 선우(單于)로 세워진다.
 
한편 위청(衛靑)은 서기전 124년 3만기(萬騎)를 이끌고 다른 여섯 장군과 총 10만의 대군으로서 삭방(朔方)의 고궐(高闕)로 출격하였다. 그런데 예맥의 용장(勇將)인 우현왕(右賢王)은 700리가 넘는 먼 거리에 한군(漢軍)이 바로 오겠는가! 하며 술에 취해있는데 위청이 이끈 한군에게 야습을 당하였다.
 
우현왕은 애첩(愛妾)과 수백기(數百騎)만 이끌고 도주하였다. 이에 한군(漢軍)은 우현왕 배하(配下)에 있던 소왕(小王) 십수인과 예맥의 남녀 1만5000여명과 무수한 가축을 획득해서 개선하였다. 이 공으로 위청은 장평후(長平候)로 봉(封)해지고 대장군이 된다.
 
또한, 한(漢)의 곽거병(霍去病)은 서기전 121년부터 대 예맥전의 참여하고 두 번에 걸쳐 감숙(甘肅)의 회랑(回廊)지대로부터 북으로 토벌에 간 그는 예맥의 혼사왕(渾邪王)의 아들을 붙잡아 휴서왕(休屠王)이 제천(祭天)에 쓰이는 금상(金像)을 뺏고 수만인(數萬人)을 죽이고 귀환하였다.
 
이에 선우(單于)는 서방수비의 실패책임을 물어 도망을 간 혼사왕(渾邪王)과 휴서왕(休屠王)을 죽이려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무제는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일선에 곽거병을 파견하였다.
 
예맥군은 한군이 보이자 항복보다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망을 가는 예맥군 8000인을 죽이자 혼사왕(渾邪王)은 휴서왕(休屠王)을 죽이고 4만인을 이끌고 한(漢)에 망명하자 분열이 시작되어 그 반수는 고비사막북방으로 밀려 나갔다.
 
지금까지 예맥의 왕이 한(漢)에 항복한 것은 고금(古今)에 없었다. 이때 항복자수는 10만이라 발표되어 혼사왕(渾邪王)은 1만호(萬戶)를 영유하는 탑음후(漯陰侯)에 봉해졌고 이로 인하여 곽거병은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나 2년 후 24세로 병사(病死)하고 만다.
 
그런데 무제(武帝)는 지금까지 연전연패했는데 예맥과 싸워서 이기게 된 그 비밀은 철을 사용함에서였다. 지나는 오랫동안 청동기와 병용된 시대가 진(秦)시대에도 화살촉은 동(銅)이었고 한고조 시대도 예맥과 같이 철 사용이 안 되고 전술적으로는 종래와 같아 예맥에 패했었다.
 
계속된 예맥(銳麥;濊貊)과 한(漢)의 전쟁 상황
 
오랫동안 예맥에게 패해왔던 한고조 유방 때, “평성(平城)의 치(恥)”로 예맥의 속국(屬國)이었던 한왕실(漢王室)은 7대 무제(武帝)가 왕이 되면서 그 수치(羞恥)를 씻기 위해 의욕적으로 전쟁준비를 해서 위청과 곽거병이 예맥을 침공하였다. 그런데 자만에 빠졌던 예맥 우현왕은 술에 취해 있는데 야습을 받아 전세(戰勢)가 바뀌어서 강대한 예맥이 불운을 맞는 결과가 된다.
 
이에 예맥은 이치사선우(伊稚斜單于)는 잃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준비를 하다가 서기전 114년, 이 선우(單于)가 죽음으로 예맥에는 4명의 왕이 나온다.
 
즉, 오치선우(烏稚單于), 아선우(兒單于), 구려호선우(句黎湖單于), 차시후선우(且鞮候單于)가 계속해서 4명이 즉위(卽位)하였다. 이 기간에도 무제(武帝)는 몇 번이나 출병(出兵)을 명하였는데 서기전 104년부터 90년간에 전쟁에서 마지막 한군(漢軍)을 지휘한 것은 이광리(李廣利; 서기전?~서기전 90년)였다.
 
한의 명장인 이광리가 구산(句山)전투에서 이기고 범부(范夫人城)까지 추격했을 때 장안에 있는 부인이 입옥(入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 왔다.
 
이유는 무제(武帝)의 식자(息子) 창읍왕(昌邑王)을 저주하여 참언(讒言)했다는 것이다. 부하 호아부(胡亞夫)는 예맥에 투항(投降)을 권했으나 이광리는 결단을 못하고 오히려 공을 세워 구하려고 질거수(郅居水;(色O格河)를 건넜다.
 
질거수를 건너서 대치(對峙)해서 하루 동안에 쌍방이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러자 한군의 장사(長史)가 “이광리 장군은 좀 이상하다. 우리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해 공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 이래서는 이길 수 없다”고 말해서 이광리를 체포하려고 했다. 이에 이광리는 장사(長史)를 죽이고 연연산(燕 然山)까지 장병을 물렸다.
 
그러나 서기전 96년 차시후선우(且鞮候單于)의 뒤를 이은 고진여선우(孤辰如單于)는 한군(漢軍) 피폐(疲弊)한 것을 알고 그들이 가는 길을 막음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전투가 밤이 되어서는 예맥군은 한군의 전방에 참호를 파서 후방으로 급습하니 이광리군(李廣利軍)은 대패하게 되었다. 대패한 이광리는 결국 예맥에 항복했다. 이같이 예맥, 한(漢)전은 치열하였다.
 
글을 맺으며 - 강성한 예맥이 약하게 된 당시 대륙상황
 
예맥이 한의 명장 이광리군과 싸워 이긴 3년 후 무제가 죽는다. 이 후 예맥과 한은 똑같이 장기전으로 피폐했다. 그리고 예맥은 서기전 57년 다섯 선우(單于)가 나오는 분열상태가 됨으로 약화하게 된다.
 
서기전 52년 선우 그 중에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의 신하로 입조(入朝)하여 한초(漢初) 이래의 예맥을 형(兄)이라 하는 외교관계는 여기서 대전환이 되었다.
 
더욱이 지나에서는 광무(光武)가 세운 후한(後漢)시대가 되어서는 ‘반초(班超)’ 등이 그들이 말하는 북 흉노도 남북이 분열했다. 이후 반초 등은 이들을 자주 공격 했으나 오환(烏桓), 선비(鮮卑) 등 다른 이민족들도 한족을 위협하게 되어 민족항쟁은 복잡화 되어갔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교체기에 일어난 민중반란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도 왕망(王莽)시대에 일어난 농민반란 중 대규모가 된 것은 유랑 집단인 ‘적미(赤眉) 난(亂)’ 때는 일시 장안에 침입했으나 얼마 아니 되어 후한군(後漢軍)에 굴복한 것인데 이들은 식량을 구하기위해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의 처참함은 인구감소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끊임없는 전쟁과 민란은 세상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서 먹을 것이 없어지자 인육까지 먹는 상황이었다. 반란과 전쟁이 발발하면 인육을 먹는 행위는 특히 기근 때에는 빈번히 행해 졌다. 지나 정통역사서인 사기(史記)에도 기근(飢饉) 때 먹었다 기록하고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전한과 후한기의 혼란기, 후한으로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에의 이행기(移行期), 수(隨)로부터 당(唐)에의 이행기, 여진족 금(金)이 송(宋)을 궤멸시켜 화북(華北)을 대혼란에 빠진 때, 원(元) 말기의 혼란기, 명(明) 말기에 일어난 때, 기근 때 등 인육을 습관적으로 먹었다고 하고 있다.
 
이는 지나의 인구변천을 보면 얼마나 비극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서기156년 후한(後漢) 때 인구 5096만6856명이 삼국시대 서기 242년에는 763만명으로 감소된 것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 기록은 중화민국시대의 학자인 진장위(陳長衛)가 1932년 8월에 중국학사편(中國學社編)으로 발표한 논문[중국인(中國人口問題)]에 나와 있다. (以上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59面~61面,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紘一 監修[世界を変えた戰爭, 革命, 反亂].52~55面, 參照, 本文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參考文獻>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한국상고사].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밝혀질 우리역사]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자부심 문화열차].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정희철, [중국은 없다].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반재원, [鴻史桓殷]. [단군과 교웅],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智勝, [우리上古史]. 이명우, 최현호, [환단고기] 이을형, [법철학강의],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紘一 監修 [世界を変えた 戰爭, 革命, 反亂]. 井上 淸, [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張金奎, [匈奴帝國].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 좋아요
    1

  • 감동이에요
    0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6월 24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으로 돌아오는 배우 '유지태'가 사는 동네의 명사들
안재현
SK에코플랜트
유지태(유무비)
나무엑터스
한준호
삼천리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0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기승 부리는 사이버 공격, 대비책은 보안뿐이죠”
보안·디지털포렌식·강의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

“톡톡 튀는 클래식 콘서트… 색다른 매력 전파하죠”
클래식 음악을 편안한 친구로 만드는 사람들

미세먼지 (2022-06-26 08:00 기준)

  • 서울
  •  
(양호 : 38)
  • 부산
  •  
(최고 : 15)
  • 대구
  •  
(좋음 : 21)
  • 인천
  •  
(좋음 : 26)
  • 광주
  •  
(좋음 : 29)
  • 대전
  •  
(보통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