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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외세종속적·후진적 조선의 미개함 질타한 서재필
‘1919 필라델피아’ 공연에서 본 한국 역사 속 개인주의
배민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8-08 09:33:09
 
▲ 배민 숭의여고 역사교사·치과의사
 지난주 용산 아트홀에서 다큐멘터리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의 공연을 봤다.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 관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1919 필라델피아’는 독특한 성격의 공연이다. 장르는 연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다양한 음악들이 공연 내용의 흐름을 주도하는 모습은 뮤지컬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뮤지컬처럼 배우들의 대사가 음율을 띠진 않고, 역사 다큐멘터리극답게 당시 현장의 역사적 인물들의 발언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충실한 공연이다.
 
그 역사적 현장의 시간·장소·인물은 다음과 같다. 1919년 4월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가 그 역사적 현장이며, 이 회의를 위해 모인 서재필·이승만·정한경·조병옥·유일한 등이 그 역사적 주인공들이다.
 
실제로 이 역사 다큐멘터리 음악극에서 내가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본 역사적 인물은 서재필이었다. 3일에 걸쳐 지속된 회의에 초대된 미국의 교수·목사·신부·랍비 등 초청 인사를 제외한, 한국인 참석자들 중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가 서재필이었다.
 
개인주의자인 내가 구한 말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 있게 보는 사건은 갑신정변(1884)이다. 맏형 격이었던 김옥균이 기획하고 주도한 이 거사에서 김옥균보다 13살 어렸던 서재필은 쉽게 말해 군사대장, 즉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던 피 끓는 청년이었다. 본시 서재필은 1882년 과거 시험 문과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합격한 전도양양한 인물이었고, 고종도 그를 각별히 생각했던 것 같다. 보수파의 세도정치와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당시 민씨 외척 세력의 견제를 받았으나 고종은 친히 그를 근대식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파의 한 명이 되어 갑신정변에 참여하게 된 그는 이 거사에서 자신이 교육시킨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서재필은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 공사의 도움으로 제물포항으로 피신하여 일본행을 결심하고 일본 상선에 승선하게 되는데, 당시 제물포항까지 쫓아온 윌렌도르프가 이끄는 관군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이들을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종용했다. 이는 마치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 관군에게 인도되었다면, 당연히 이들은 처참하게 도륙당했을 것이다. 이후 서재필의 일가친척들은 연좌제를 적용한 조선 정부에 의해 자살을 포함해 사실상의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적어도 서재필은 명확히 간파했다.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를 이해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민중의 부재였다. 그는 외세종속적이고 후진적인 정체된 사회로서의 조선의 미개함을 질타했는데, 이는 일본의 어느 식민사학자의 20세기 발언이 아니라, 1895년 겨울 조선으로 다시 귀국하기 이전 미국에 머물던 시절 의과대학을 졸업한 서재필이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보며 생각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1896~97년 미국인 아내와 한양에 머물던 당시의 그는 철저히 미국 시민권자로서 행동했다. 사람들 앞에서 거의 영어로 대화했으며 조선 정부의 어떠한 관직도 거절했고, 고종 앞에서도 절하는 대신 악수를 청하여 대신들을 경악시켰다. 심지어 자신에 대해 거짓 상소를 올린 한 개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여 당시 설립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고등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손해배상금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집단적 정쟁에 빠져 있던 조선의 정치인들 중에선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생소한 개인주의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위와 같은 조선 정부와 민중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신문 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민중 계몽을 위한 노력을 시도했다. 이 대중 계몽의 핵심에는 바로 그의 서구적 개인주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독립을 지켜 나가기 위해선 국가를 구성하는 개별 국민이 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개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 시절의 서재필, 즉 대중 계몽의 선각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교과서를 통해 배웠고 그의 주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을 다시금 갖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와 독립협회의 노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제국의 수구파 관료들, 즉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방해를 받고 결국 무산되고 만다. 
 
그는 독립신문의 글을 통해 “매관매직을 하는 탐관오리들은 모조리 죽여서 그 시체를 실은 배도 바다 한가운데에 침몰시켜야 한다”고 격분을 참지 않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뿐이었다.
 
짧긴 했지만 그가 조선에 잠시 돌아와 머물던 독립협회 활동 시절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학생 중 한 명인 이승만은 이후 서재필의 행적을 아주 비슷하게 이어가게 된다. 내가 지난주 관람했던 ‘1919 필라델피아’ 공연에서는 바로 50대 중반이 된 관록의 서재필이 당시 40대의 의욕에 찬 이승만을 다독거려 가며 회의를 주도해 나가는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의 서재필은 분명 갑신정변 당시의 서재필과도, 독립협회 당시의 서재필과도, 이후 해방 후 다시 잠시 귀국했을 때의 서재필과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 서재필이라는 인물의 의미는 무엇보다 최초로 진정한 개인주의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한국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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