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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 예술에 관한 한 우리는 유구한 전통과 유산을 지니고 있지만 ‘현대미술’이라는 지점을 마주하게 되면 아무래도 움츠러들곤 한다. 현대미술의 이니셔티브를 우리가 쥐고 있지 못해서이다.
현대도자 예술의 전환점은 1950년대 미국의 피터 불커스 등의 아티스트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호안 미로나 파블로 피카소 등은 도자를 자기들의 개성적 표현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도자 특유의 정형성을 해체시키곤 했다. 안팎의 혁신적 시도들을 바라보는 당시의 도예계는 착잡했을 것이다. 오랜 전통을 허무는 시스템의 변화에 직면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쓰임새가 없어진다는 것에 정체성의 혼돈을 과하게 겪었다. 하지만 시대의 패러다임이 대전환을 하고 있는 21세기의 시각에서는 그것을 도자 예술의 영역 확장이자 다변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경우 1980·1990년대에 정체성과 현대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고뇌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러한 정체성 혼란기의 작업들을 돌아보면 의외로 밀도와 완성도가 높았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실용과 표현을 절충한 애매한 스탠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조형적 완성도에는 충실했던 것이다. 오늘의 도자 예술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장르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흙의 물성을 기반으로 한 조형작업이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다른 장르와 비교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마이너리티를 극복하기 위한 각고의 실험과 연구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는 미술계가 워낙 이데올로기 대결 구도에 몰입해 있던 때여서 이런 노력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점이 있다. 늦었지만 미흡하나마 조명의 기회가 왔으면 한다.
당시 도자 예술의 전환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작가가 있다. 현대도자 운동에 앞장선 선구자들은 다수 있다. 그 가운데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도조(陶彫)의 심미적 가치를 탐구하고 극대화시킨 점에서 주목받아야 할 작가는 한길홍(79)이다.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소위 도조 특유의 심미적 특성을 극대화시키고, 아울러 크기의 열세를 완성도와 밀도 등의 질적인 우위로 극복함으로써 도조의 수준을 끌어올린 작가다. 특히 흙의 물성을 중시하는 우리의 미의식을 보다 자유롭고도 절제된 모델링을 통해 심미적 도조 조형의 모델을 구축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조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길홍의 작품들은 흙의 가소성을 이용한 다양한 모델링과 표면에 구현되는 회화적 효과 등의 면에서 발군이다. 형태나 표면 공히 투박하고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세련된 감각과 내공이 돋보인다.
작가의 도조가 시작된 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추구해 온 주제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생(生)’ ‘합(合)’ ‘윤회(輪廻)’ ‘관토(觀土)’. 세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에서 서정성과 유려한 감각이 생생히 드러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80년대 초 ‘생(生)’ 연작에서는 공간적으로나 형태적으로 기(器)의 근간에 표현적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절충적인 양식을 보인다. 대부분의 토기 도조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앙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에서 볼 수 있는 운동의 흔적들이나 마티에르 같은 효과들이 곁들여져 있다. 이는 작품에 생의 활력과 기운 생동의 정서를 불어넣어 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에 걸쳐 선보인 ‘합(合)’ 연작의 경우 전자의 ‘생’ 연작의 연장선 상에 있으면서도 표현의 자율성이 양식적으로 본격화의 경지에 접어들게 된다. 이질적인 혹은 ‘미세하게 유사한 다름’이 감각적으로 유쾌한 조합의 포인트가 된다. 기하적인 것·유기체적인 것·정형적인 것·비정형적인 것·입체적인 것·평면적인 것 등이 다양한 조합을 이루면서 구조 내의 감각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대적 트렌드와도 궤를 같이하면서 표현 자체가 방법적으로 다양해지고, 해석과 반응은 시너지를 유발하면서 성취도를 높인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작가의 작업은 ‘윤회(輪廻)’로 이어진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불교 사상이나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 사상의 상대주의 혹은 변증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며, 이전의 ‘합’ 연작보다 철학적으로 진일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다분히 공간의 차원에서 전개된다면, 후자는 시간이 개재된 다차원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 간의 물리적인 조합에서 나아가 존재의 영원한 유전(流轉)을 자연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더욱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가운데 도자만의 감각과 취미가 절묘하게 구현되고 있는 양식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작업의 주제는 ‘관토’이다. 흙에 대한 관조, 즉 모종의 심미적 ‘거리’ 혹은 ‘초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주제이다. 대상에 대한 정신적 몰입을 통해 자아의 진정한 자유를 도출해낼 수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작품은 당연히 작가의 의도와 행위의 결과이지만 작가 스스로의 역할을 최대한 절제하며 작품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도자 작업의 물성적 왜곡을 지양함으로써 작품의 향유와 해석이 보다 열린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한다. 작가가 반세기에 걸쳐 추구해 온 우리다움의 ‘미’의 종착점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점과 관련해 필자가 문화일보(23.2.7)에 게재한 에세이의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한국의 도자 예술은 전통적으로 형태나 물성에 있어 흙의 따스하고 자연스러운 물성을 잘 살려낸다. 이러한 점이 심미성을 추구하는 한길홍의 작업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사실 도자는 다른 장르에 비해 복잡한 과정들이 수반되는 것이다 보니 남다른 에너지와 내공이 요구된다. 경륜이 곧 결과를 결정해 주는 세계다.
흙이 주는 따스함과 그윽함이 비상(非常)하다. 반세기 넘게 흙과 살아온 연륜의 열매는 정신의 자유로움, 즉 깨달음이다. 각양의 도편(陶片)들이 무위의 작용과 구성에 따라 갖게 되는 물성의 심미적 모멘트들이 환상적이다. 흙을 관조한다는 ‘관토(觀土)’, 무욕과 무념으로 내면이 편안하다. 고요함 속에서 꿈틀대는 이 흥은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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