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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와서 판소리를 공부 중인 카메룬 출신 여성 소리꾼이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다. 파리 삼성전자에서 근무 중 우연히 관람한 판소리 공연에 매료되어 출연자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 한다. 한국에 오면 가르쳐 준다는 말 한마디에 정말로 찾아왔더란다. 설마 올까 싶었다는데,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정말 한국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열정이 감동적이다. 우리 같으면 그런 말은 보통 의례적 인사로 하는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 여성을 보며 한 번의 경험이 인생까지도 바꿔 버릴 수 있음을 실감했다.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상투적인 인삿말을 남발하는 우리에겐 신선한 미담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니 필자도 적지 않은 작가들에게 작업실 방문을 하겠노라는 말빚을 쌓아 왔던 것 같다. 못 지킨 약속이 더 많다. 물론 그들이 기다렸을 리도 없고, 또 성가신 불청객이 될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핑계도 있었다. 작업실 방문을 위한 적당한 기회와 명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러나 진심으로 꼭 방문하고 싶은 작가들도 있다. 특히 봄을 맞아 분위기 있는 스튜디오 투어를 하고 싶은 충동이 더 강렬해진다. 같은 작품도 전시장에서 보는 것과 작업실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이왕이면 작업실에서 날것으로 보고 싶다. 마침 광주 오포 근처에 갈 일이 생겼다. 그곳에 사는 작가들이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김일해(金一海) 작가다. 작업실에 들르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말빚도 말빚이지만, 작업실을 진심으로 찾고 싶었다. 특히 행복감과 활력을 얻고 싶을 때 종종 생각이 났던 터이다. 게다가 봄의 ‘시즌 송’ 하면 ‘장범준’이듯, 봄의 ‘시즌 그림’ 하면 단연 ‘김일해’ 아닌가.
광주 불곡산 기슭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작가의 작업실. 그곳에서 마주한 그의 그림들은 익히 알던 화면 그 이상으로 눈이 부셨다. 빛과 대상의 조화를 절묘하게 극화(劇化)하고, 강렬한 색조와 대담하고도 감각적인 필치가 어울려 생동감과 우아함이 넘치는 화면들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만 보기 아까워 인사는 건네는 둥 마는 둥, 바로 폰을 꺼내 셔터부터 누르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행복감 넘치는 황홀한 조우를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자신부터가 현대미술에 대해 현학적인 글쓰기를 많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거 다 접고 오로지 쾌락주의자가 되어 감각적으로 그림들을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작가 그림의 핵심은 빛이다. 빛으로 충만해 있는 세계, 그로부터 색이 연동된다. 밝고 쾌청하며 몽환적인 분위기의 원동력이 바로 빛이다. 심미 세계의 통로이자 매개이며, 단서인 빛. 생명력으로 가득한 세계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의 화면에서는 빛을 렌즈에 맺힌 것처럼 기계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감각적 조율을 행한 것 같은 느낌으로 표현했다. 누드의 경우 빛의 노출을 더 과장하여 형태 자체보다는 하나의 리듬을 가진 일루전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노출값을 더 올린 강렬한 대비와, 대담한 색면이 지배하는 화면은 리드믹한 필치와 어울려 영감과 서사로써 우리의 시각과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렇듯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작가의 빛은 색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상주의적 색 분해와 배색을 주조로 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보색 대비는 활기차고 싱그러운 느낌과 함께 환각을 일으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 백미가 아닐 수 없다. ‘맨드라미’(2019), ‘살비아’(2014), ‘Welcome’(2016) 같은 작품들에서 보듯 적색과 청록색의 대비는 야생의 생명력을 강하게 발산하고 있으며, 특히 거대한 화면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관람자들의 오감을 압도한다. 이러한 색상 대비 외에도 필요할 때는 강렬한 원색을 과감하게 구사하며, 또한 중성적인 톤이 필요한 대목에서는 솜사탕처럼 유려하고 감미로운 색조를 구사하고 있다. 작가의 화면에서 화려하고도 강렬하며 원시적인 생명력 같은 것이 짙게 느껴지는 건 이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때로는 색면을 대담하게 가져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면과 물 흐르는 듯한 필치를 구사하는 등 완급을 절묘하게 제어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작가가 지닌 의미있는 특징이 있다. 그는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은 가볍고 사소한 소재들조차 화면에서는 그림이 되게 하는 마법사 같은 역량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평범한 소재를 참신하고 감각적으로 절묘한 환영과 심미의 세계로 변신시키는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눈’(2010), ‘모정’(2018), ‘정’(2014) 같은 작품들이 그 좋은 예다. 의외의 소재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 자체도 신선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스토리텔링의 실마리가 되고 있으니 그렇게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원래가 아름다운 대상을 대상만큼의 아름다움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은 보통의 흔한 그림이다. 매혹적이거나 심미적인 대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무난한 그림의 밑천이니 말이다. 그러나 보통의 작가들에게서 외면받는 볼거리나 매력이 없는 대상을 감각적 신세계로 변모시키고 생동의 서사를 담담하게 전개해 나가는 그림은 다소 모험적이기는 하지만, 그림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 있는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사생을 중시한다. 사진 같은 자료보다는 현장에서 대상과 직접 마주하면서 크로키를 하거나 화폭에 담아낸다. 그것은 그가 형태나 원근 등의 외적인 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비롯해 서사·자신의 감정·분위기 등을 종합적으로 화면에 투영시키는 사생의 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대상과 환경을 해석하며, 그에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존재로서의 화가상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다. 사생은 구상회화의 건강함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사진에 의존하거나 혹은 마치 사진과 리얼리티 경쟁을 하는 것 같은 양상들이 구상회화의 한 단면일 수는 있지만, 궁극의 방향성은 아니다. 현대미술이라는 각축장에서 구상회화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무도 명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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