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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인터뷰] 탈북 정착 20년 한의사 한봉희 원장
“북한 사람 아닌 도전자로 일군 삶 행복합니다”
북에서 왔다는 정체성에 갇히면 고단한 현실 못 벗어나
뭐든 새 출발에는 시행착오… 희망 품고 사는 게 중요
“날 인정해 주는 동네분들이 고맙고 그게 힘이 돼요”
임한상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3-28 00:05:56
 
▲ 한봉희 100년한의원 원장은 북한에 대해 모두 함께 잘살아 나가야 할 우리의 핏줄이며 대한민국의 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아버지가 쓴 수기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을 2019년 6월 출간했다.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정말 갖가지 어려움으로 한국에서 적응에 어려워하는 탈북인을 많이 봤죠. 법을 제대로 몰라서 사기를 당하고, 친구를 잘못 만나서, 여자나 남자를 잘못 만나서, 한국 사람과 문화가 달라 소통이 안 돼서 힘들어 하고, 또는 친구가 없어 외로워 하는 등 만만찮은 삶의 현실에 많이 힘겨워 합니다.
 
한봉희(47) 100년한의원 원장은 20018월 한국에 입국한 탈북인이다. 강산이 벌써 두 번이나 변했다. 당시 20대 중반의 꽃같은 청춘이었지만 자유의 땅에서 어느덧 중년이 됐다. 그는 탈북인이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 지난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깝다고 말했다.
 
“20여년 전 한국에 와 정착할 무렵 또래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무척 낙담했죠. 뭔가 새롭게 공부하기에 나이가 많다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당시엔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된 상태였죠.
 
원래 삶 자체가 어려운 것이고,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졌을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모살이(벼를 심어 어느 정도 자라면 논에 옮길 때 모가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나는 기간) 기간이 필요한 것처럼 새로운 시작에는 도전이 있고 시행착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말이죠.”
 
드리워진 북한의 그림자
 
▲ 한봉희 원장은 북한에서 스케이트를 배운 적이 있어 운동을 좋아한다며 시간이 생길 때마다 스케이트와 비슷한 운동인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주 2회 탁구를 배우고 있다고 밝혔다. ⓒ스카이데일리
 
한 원장은 1976년생으로 함경북도 길주군 출신이다. 기계 설계에 정통한 과학자인 아버지와 내과의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1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둘 다 대학을 졸업한 북한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인텔리였다. 아버지는 함흥화학공업대학 기계공학과를 나와 길주의 펄프공장에서 설계원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청진의과대학을 나와 길주의 철도국 병원에서 내과의사로 근무했다.
 
점차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고 있어요. 아버지는 기계설계와 발명·기술혁신·창의 고안 등에 몰두한 과학자셨죠. 정의감이 강하셨고,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효율을 높이고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기계설계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셨어요.
 
어머니는 내과의사로 늘 바쁘셨어요. 철도국 소속 병원이어서 철도에서 사고가 나면 늦은 밤이라도 무조건 달려 나가셨죠. 끔찍한 현장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셨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절대 의사는 안 할 거라고 다짐했었죠.” 
 
하지만 그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상지대 한의예과에 들어가 한의사의 길을 택했다. 의사라는 직업을 그토록 기피했지만 의사가 된 걸 보면 성장 환경과 어머니의 DNA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지금은 환자를 치료하는 한의사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길주군은 북한의 핵실험장으로 잘 알려진 풍계리가 있는 곳이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양강도와 동해를 따라 러시아 국경을 잇는 두만강역 쪽으로 가는 갈림길에 있어 길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길주는 저에게 추억이고 그리움이자 아픔이에요. 태어나서부터 다닌 탁아소·유치원·학교가 있고, 영하 30도가 넘는 겨울이면 스케이트 훈련도 하고 경기도 하던 논밭과 20여 리나 되는 길을 따라 산속에 있는 홍수리 저수지 등이 눈에 선해요.”
 
그는 학창 시절 학교를 대표하는 스케이트 선수로 활동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청진의 전자자동화단과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길주에서 기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라 한다.
 
북한의 교육은 학교에서 모든 것이 이뤄지죠. 평소에 자주 시험을 보며 채점한 시험지를 벽에 붙여 학생들이 볼 수 있게 해요. 공부 잘하는 순서로 시험지를 붙이고 다음번 시험지는 또 그 아래에 붙이면서 시험지는 점점 길어지죠. 시험을 봐서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또 재시험을 보고 그러다 보면 시험지 길이가 더 길어지죠. 성적을 잘 받으면 일찍 집에 갈 수 있어요. 대학에선 아예 성적을 전교 게시판에 붙여요. 자기 성적뿐 아니라 관심 있는 학생의 성적도 볼 수 있죠. 그 성적을 보게 되면 승부욕과 수치심이 동시에 들어 더 노력하게 되더군요.”
 
한 원장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직장생활로 바쁜 탓에 할머니 손에서 컸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과 고난의 행군까지 겪은 분이었다. 그는 할머니를 추억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버지 어머니 퇴근 시간은 밤 9~10시였어요. 할머니는 늘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를 키워 준 분이시죠.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랐으니까요. 할머니 친구들은 손녀들이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고 놀라기도 하셨고 은근 부러워도 하셨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라고 불렀어요.”
 
볏겨 식량 배급으로 북한 불신감 팽배
 
탈북 당시 북한 사회의 실상을 묻자 그는 식량난으로 고통을 받던 고난의 행군(1995~1999) 시기 중국에서 사료로 들여온 볏겨를 주민들에게 식량으로 공급하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불만을 토로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많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가축들이 먹는 겨를 먹어 본 적은 없다고 하셨어요. 그때는 혹여 할머니가 나가서 말실수 하실까 봐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말렸던 기억도 있어요.”
 
“그럼에도 19947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큰 상실감과 허무함에 휩싸였어요. 나라의 큰 기둥이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었죠. 아들 김정일이 정권을 이어받으면서 북한은 폐쇄국가가 됐고 경제 상황은 더 나빠졌죠.”
 
한 원장은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북한이라는 사회를 바로 볼 수 있었다. TV에서 보던 배움의 열정으로 청춘을 불태우는 대학 생활은 거짓이었다. 학비 없는 대학 생활은 대학생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했고, 배고픔과 추위·병마와 싸워야 하는 힘든 나날이었다.
 
대학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과학성과 우월성을 교육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비현실적인 사회적 모순을 보게 됐죠. 4학년이던 19972월 김정일의 논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199411월 발표)’에 대한 문답식 경연을 준비하면서 논문에서 주장하는 사회주의 우월성은 허구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문답식 경연 날 황장엽 선생의 한국 망명이 알려지면서 경연이 취소되어 너무 기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후유증으로 대학생들은 엄청난 사상단련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지만요.”
 
그후 자본주의 황색 바람을 차단한다며 대학에서 수없이 시행된 주체담벽 쌓기강연을 들으면 들을수록 두만강 너머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더 커져만 갔다
 
“19978월 대학을 졸업하면서 북한 사회의 병들어 가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앞날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만 갔어요. 북한이라는 암울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843일 차디찬 두만강을 건넜죠.”
 
나머지 가족도 19988월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다. 2년 반 정도 중국에 체류하면서 북한에서보다는 자유를 누렸지만 보이지 않는 공포가 늘 엄습했다. 
 
“북한 당국이 거액의 현상금과 수배 사진을 내걸고 아버지 체포령을 내렸는데, 북한은 물론 국경연선과 중국의 옌지 조선족자치주까지 소문이 퍼졌어요. 우리 가족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혔죠. 
 
귀순의 기회를 살폈던 부모님은 현상금을 노린 밀고로 20009월 길림성 옌지에서 다롄으로 이동한 직후 중국 공안에게 체포돼 북으로 끌려갔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따로 움직였던 세 남매는 다행히 무사하게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부모님은 심한 고문을 당해 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적셨다.
 
한 원장은 20018월 캄보디아와 태국을 거쳐 자유를 찾아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 기둥이었던 부모님과 생이별을 해야 했기에 행복보다는 아픔이 더 컸다. 당시 몸과 마음은 상실감과 우울감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는 흔들릴 때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씩씩한 기상과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방과 양방 공존하는 의료체계 필요
 
▲ 한봉희 원장은 2011년 7월부터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에서 100년한의원을 개원해 운영 중이다. 그는 자신에게 아픈 몸을 맡겨 준 지역주민들이 고맙고 몸이 많이 나아졌다는 인사를 받을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스카이데일리
 
정착한 지 20여 년 만에 한국 사회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그는 대학 시절 2년 연상의 탈북민 한의사와 결혼해 12녀를 뒀다. 하지만 여느 탈북인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본과 1학년을 마치고 결혼해 두 아이가 태어났고 두 번 휴학을 하면서 공부를 마쳤어요.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거예요.
 
한국 사회에서 탈북인이 겪는 삶의 시련과 어려움은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런 어려움을 나는 북한 사람이니까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국한시켜버리면 고단한 현실에서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봐요. 그래서 지금의 어려움은 당연한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에게 우리 사회와 의료체계가 북한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물었다“한마디로 자유예요. 한국은 북한과 달리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며 살고 있지만, 대신 모든 것이 풍요롭고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사회라는 걸 알게 됐어요. 나이 제한 없이 공부할 수 있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죠.”
 
북한은 한의학을 동의학이라고 불러요. 한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전통의학인 동의학이 의료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죠. 진단은 양방으로 하고 치료는 동의학으로 해요. 서양의학과 동의학의 공존으로 환자의 치료율을 높이기 위한 과학화를 시도하고 있죠. 한국처럼 양방과 한방이 극과 극으로 대치돼 싸우지는 않아요. 북한에선 의사들도 매해 약초를 캐 와야 하는 과제를 받게 되고 봄·가을에 약초를 채집해요. 내과의사였던 어머니도 그랬죠. 또 북한은 민간요법을 장려해요. 뉴스 마지막에는 꼭 건강상식으로 민간요법을 소개하고 있어요(웃음).”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원장은 끝으로 탈북인으로서 할 수 있는 남과 북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환자들이 제법 많아 바쁘지만 통일운동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탈북인의 정체성을 갖고 한국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고 모진 아픔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온 내 자신과의 사투, 그걸 통해 얻은 경험과 지혜를 많은 탈북인들에게 나눠 주고 싶어요.
 
한 원장은 2020년 2월 아버지 이름을 따 한원채인권재단을 출범해 북한인권운동에 헌신해 온 숨은 일꾼들을 발굴해 시상하고 있다. 
 
◆한봉희 원장 프로필= △1976년 함경북도 길주군 출생 △1993년 청진전자자동화단과대학 입학 △1997년 청진전자자동화단과대학 졸업 △1998년 4월 탈북 △2001년 8월 한국 입국 △2003년 상지대 한의예과 입학 △2011년 상지대 한의예과 졸업 △2012년 2월 100년한의원 원장 △2019년 5월 한약재 알칼리 이온화 조성물 및 당뇨병 치료제 특허 등록 △2019년 5월 국회상임위원장상·창조경영인상 수상 △2019년 6월 아버지 수기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 출간 △2020년 2월 경희대 경락의과학과 석사 △한원채인권재단 이사장 △2021년 3월 ‘금침, 10년이 젊어진다’ 출간 △2022년 12월 ‘이명 한의학’ 출간 △2023년 8월 경희대 경락의과학과 박사과정 졸업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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