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83] 철병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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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의병대장들의 손발이 안 맞는 상황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5-03 10:30:57

서울의 찬 공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성급한 봄꽃이 꽃망울을 만들 무렵인 3월 2일,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조선 정부의 공문을 받았다. 그 내용은 이랬다.

“1895년 윤5월 7일 내환외우가 진정되고 병제 정비가 되기까지 귀군을 국내 각처에 분산 주둔시켜 불우에 대비할 것을 전임 외부대신이 의뢰했었는데, 다행히 귀국의 호의로 이것이 승낙되었음은 우리 정부가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병제도 어지간히 정비되어 국내의 불우에 대비하기에 족하므로 각지에 분산 주둔해 있는 귀군은 속히 철수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왜군 철병을 위한 고종의 노력 일환이었다. 고종은 아관망명 직후 갑오·을미역적들을 처리한 뒤, 전국 의병들에게 역적들이 다 처단되었음을 알리고, 또 단발 여부도 개인의 자유로 정할 것을 명했다. 여러 조건이 충족되었으니 의병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하여 지방을 안정시킨 다음, 경복궁 앞 광장에 주둔한 왜군병영의 이전을 요구한 것이다.

공문을 읽은 고무라는 ‘올 것이 왔구나’하는 기분이었다. 합리적인 그는 고종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답변안을 본국에 제안했다. 하지만 사이온지 외상은 고종의 요구를 묵살할 것을 훈령했다.

“지금 귀국(조선을 뜻함) 내지의 형세는 매우 불온하므로 우리 재류민의 보호상 아직도 군대를 주둔할 필요가 있다. 추후 귀국의 형세가 진정되고 우리 국민에 대한 위험이 없어지면 공사관의 경비를 위해 약간을 주둔시키는 것 외에는 우리 군대를 모두 철수시키겠다.”

고무라는 8일 동안 본국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결정을 내린 고무라는 3월 10일에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철병거부 답신을 보냈다. 즉 일본정부는 조선의 ‘내지 형세’가 ‘매우 불온하다’는 이유를 들어 왜군철수를 연기한다고 함으로써 고종의 철병요구를 공식적으로 거절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 답변을 올리고자 고종을 알현했다.

“전하, 일본 공사관에서 철병을 공식적으로 거절하는 답이 왔습니다. 아직 조선의 형세가 불안정하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나도 그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지금 나의 명령을 받고도 해산하지 않은 의병들이 많은가?”

“그렇습니다, 전하. 유인석·이소응·기우만·김하락 등이 병사를 해산시키지 않고 곳곳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관군이 그들을 진압하는데 왜군의 도움을 받는 형세입니다.”

이완용이 아뢰었다.

“허허, 이거 큰일이 아니오. 내가 아관으로 망명한 지금이 왜군을 철병시키기 가장 적합한 때인데 말이오. 돌아가신 왕비도 러시아의 힘을 빌어 왜군을 축출하려고 애쓰다가 저리 간 것이 아닌가!”

고종이 탄식했다. 왕과 의병대장들의 손발이 안 맞는 이 상황은 나라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들이 해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경은 아는가?”

“황공하오나 전하, 유인석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자들이옵고, 그들은 서양식 개화와 개혁에 반발하고 있사옵니다. 이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전하의 해산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왜군과 관군에 대한 의병전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심히 안타까운 일이옵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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