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99] 허탈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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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08 06:20:55

“당신도 얼굴 세탁해서 인생 바꿨는데 영부인은 왜 불만인가요. 내로남불 아니에요? 형수 생식기 찢겠단 사람이 사람입니까? 그 인간이 사회주의 하자는데 괜찮냐고요. 사회주의 하면 당신 남편, 지금처럼 돈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병원 의사들 의료 기술은 좋아질 것 같아요? 당신 수술은요?

잊고 있었던 악몽 헤집어놓고, 아픈 상처 건드려 놓고, 내 딸이 엄마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딸과 나 사이 멀어지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 수습한다고요? 당신 같은 개딸들은 뭐든 저질러 놓고 아니면 말고, 그런 식으로 삽니까. 맨살에 소금 뿌려 놓고 아파하면 물로 헹굴게, 그러면 다예요?

수정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신 수정이 부르지 마세요. 나는 형수 보지 찢겠단 놈이 당선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 인간이 됐으면 승준이 좋은 대학 못 가요. 입시제도도 발기발기 찢어 놓을 거 아냐, 거기 찢듯이.”

승연은 허탈함에 다리 힘이 빠졌다. 강윤희를 만나기 전 까닭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던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승연이 모르는 큰 비밀을 강윤희가 쥐고 있는 건 아닌지 안절부절못했던 시간이 허무했다. 시샘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세는 기술이라더니. 암튼 저 돌대가리들 생각하는 꼬라지가 겨우 시샘 때문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픔을 인질로 딸아이를 볼모로 저주보다 깊은 상처로 내 가슴을 후비려 하다니. 자기 과거는 칼로 찢고 실로 봉합해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묻었으면서.

니들이 그렇지. 가식과 모순 덩어리들.

한편으론 수정에게 당당할 수 있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당장 수정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수정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좀 더 성숙하고 나면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였다. 오해를 풀기 위해 그날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건 수정에게 벅찬 과제를 주는 것과 같았다. 그때 그 시절의 아픔을 수정이가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승준 엄마의 질투를 이해하는 건 벅찬 과제였다. 수정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그런 과정을 통해 쟁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건, 구차하고 억지스러웠다.

승연은 저녁에 수정이가 좋아하는 햄 파이를 준비하기로 했다. 화해의 제스처다. 달걀물을 프라이팬에 깔고 그 뒤에 다진 햄을 얹어 노릇하게 굽고 햄 위에 모짜렐라 치즈와 또띠야를 올려 뒤집으면 맛있는 햄 파이가 됐다. 수정이 엄마와 화해하든 말든 승연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승준 엄마가 잘못 알고 떠도는 소문을 말했을 뿐이라고 할 거니까.

그럼에도 승연은 왠지 모를 허탈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과거는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지난 시간의 뇌사상태인 채,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저녁 식사를 막 끝냈는데 친정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 주말이 아버지 기일인데 참석할 수 있겠니?” 달력에 표시해 두었는데 수정이 모의고사 신경 쓰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럼요 엄마, 꼭 가지요. 배 서방한테도 얘기해 둘게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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