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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늘이 주신 이 기회에 왜군을 조선에서 밀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전하, 왜인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니 지금 더 이상 철병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인 듯 하옵니다.”
이완용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병대장들이 개화라는 국가정책을 맞서서, 일본군을 내보내려는 국왕의 중차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함이 속상할 따름이다.
고종은 며칠 후인 3월17일에 한 발 후퇴하여 경복궁 앞의 왜군 병영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라고 요구했고 고무라는 병사이전 준비에 착수할 것을 지시한다. 고무라가 조선정부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조선정부가 왜군이 궐문근처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국왕이 환궁을 기피한다는 견해를 전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따뜻한 햇살이 몰려오는 오후에 베베르가 고종을 찾았다. 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있었다. 한참 업무를 보던 중에 들른 것이다.
“전하, 고무라 공사에게 다시금 철병을 요청하셨다지요?”
“그렇습니다. 베베르 공사. 도대체 그들이 조선 땅에 있어야하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고무라 공사가 답을 하였나요?”
“방금 답을 했습니다. 그 일로 급히 베베르 공사를 뵙자고 한 것입니다.”
고종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 편안한 표정은 사라지고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있었다. 목소리도 다소 높았다. 그런 고종의 곁에는 엄 상궁이 안타까운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전하의 음성을 들으니 고무라 공사가 무어라 답했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베베르가 말했다. 지난 4개월 간 낮밤으로 함께한 사이이다. 베베르는 고종의 표정만 보아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아주 단호하게 철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베베르 공사가 나를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귀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려주시고 조선에서 일본군이 물러가도록 압력을 넣어주세요!”
고종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일본군이 조선에 남아 있는 한, 조선은 독립과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소인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베베르가 물러가고 고종은 엄 상궁을 돌아보았다.
“엄 상궁, 자네는 내 마음을 알겠는가?”
“소인이 전하의 간절함을 모르면 그 누가 알겠습니까?”
엄 상궁이 허리를 굽혀 답했다.
“그럴 테지, 그대의 충정은 깊고도 깊지. 나는 요즈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한다.”
“만백성의 아버지이신 전하께서 마음 편할 날이 있으시겠나이까?”
“어디서부터 조선이 약해졌는지, 아버님의 치국은 과연 성공적이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보면 동이 트곤 하는구나.”
“전하, 강녕하셔야 합니다. 편히 침수에 드시고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엄 상궁이 간절하게 말했다. 경복궁 시절이야 독시(毒弑)의 위험 등으로 밤을 지샌 적도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많은 병사가 지키고 있다.
“자네는 궐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가?”
고종이 물었다.
“철종 임금님 시절이니 꽤 되었습니다.”
“그때 궐은 어떠하였는가?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거라.”
“전하, 소인네는 지밀로 들어왔습니다. 다섯 살 어린 아이인 소녀가 무엇을 알았겠나이까?”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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