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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동남쪽에는 노국(奴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야마대국의 속국인데도 몇 해째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왕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노국의 처리 문제에 대해 숙의했다.
이지마(伊支馬) 무정천구(武渟川九)는 강경했다.
“노국은 우리의 속국 중 가장 강성한 나라입니다. 저들의 잘못을 방치하면 주변 소국들도 동요할 겁니다. 군사를 보내 응징해야 합니다.”
미마승(彌馬升) 대록첨(大鹿詹)은 생각이 달랐다.
“노국이 비록 다른 소국에 비해 큰 나라라곤 하나 우리나라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사신을 보내 사리를 밝혀 꾸짖기만 해도 겁을 먹고 조공을 다시 바칠 겁니다. 번거롭게 군사를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니 왕이 결정하기 어려웠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회의를 마친 왕은 고뇌에 찬 얼굴로 비미호의 처소를 찾았다.
왕의 얼굴빛이 어두운 것을 본 비미호가 다정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이리 근심이 깊으십니까?”
왕이 이내 안색을 바꾸고 소탈하게 웃었다.
“나랏일 때문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래도 혹시 압니까. 신첩이 도움이 될지요.”
왕은 넋두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노국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비미호는 끝까지 열심히 듣고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먼저 각국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왕을 초청하십시오. 만일 노국 왕이 응한다면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잘 타일러 조공을 바치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핑계를 대고 오지 않는다면 반역을 꾀할 뜻이 있는 것이니 한자리에 모인 왕들과 함께 나아가 정벌하는 겁니다.”
명분을 얻는 동시에 걱정거리를 없앨 수 있는 절묘한 계책이었다. 왕은 비미호의 계책에 따라 주변국들에 사신을 보냈다. 각국의 군주는 야마대국 왕의 초청을 받고 앞 다투어 달려왔다.
노국 왕은 고민했다. 야마대국에 간다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울 테고, 안 가면 이를 핑계로 쳐들어올 게 분명했다.
노국 왕 옆에서 비노모리(卑奴母離) 죽야청(竹野淸)이 충동질했다. 조공을 보내지 않은 일도 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우리가 패권을 잡으려면 야마대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자웅을 겨뤄 보는 겁니다. 저들은 오랫동안 안일하게 지내 왔기에 착실히 힘을 길러 온 우리 군사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싸우다 죽겠다고 결심한 노국 왕은 야마대국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야마대국의 도성은 각국에서 모여든 왕과 수행원들,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관리와 궁인들로 붐볐다. 그 속에서 노국 왕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야마대국 왕은 언짢은 얼굴로 좌중을 둘러봤다.
“여러분을 이렇게 모신 이유는 노국 문제 때문이오. 근래 들어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고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가 속속 들어오고 있소.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도국(伊都國) 왕이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는 불충입니다. 소국은 대국을 웃어른 모시듯 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조금 생겼다고 상국을 칠 생각을 한다는 건 무도한 일입니다. 저를 선봉으로 삼아 주십시오. 당장 달려가서 노국 왕을 징치하겠습니다.”
이에 뒤질세라 다른 군주들도 나서서 노국 왕을 성토했다.
야마대국 왕은 상기된 얼굴로 좌중을 둘러 보았다.
“그대들의 충심에 내 깊이 감복했소. 뜻이 모두 이와 같으니 군사를 일으켜 노국을 치겠소. 이도국 왕이 선봉에 서 주시오.”
이리하여 이도국을 필두로 불미국·사마국·이백지국·이야국 등의 나라가 노국 정벌에 참여했다.
연합군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자 노국 왕은 당황했다. 야마대국만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다른 나라들까지 합류했으니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노국 왕은 대책을 묻기 위해 죽야청을 찾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왕은 할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노국 왕은 야마대국 왕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신이 한순간 미쳤었나 봅니다. 저의 목을 거두시고 사직만은 보존케 해 주십시오.”
야마대국 왕은 손수 노국 왕을 일으켜 세웠다.
“누구나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있소. 그걸 알았으면 바로잡으면 될 일이오.”
야마대국 왕은 노국 왕을 벌하지 않고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를 지켜본 군주들은 야마대국 왕의 덕에 감복했다.
이후 노국은 충실한 동맹국으로 야마대국에 큰 힘이 되었고, 이를 끌어낸 비미호에 대한 왕의 믿음은 굳건해졌다. 이후로 국왕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불러 의견을 들었다.
지병으로 고생하던 왕후 일엽(一葉)이 죽자 야마대국 왕은 비미호를 왕후로 삼았다. 그녀는 왕후로서 왕실의 대소사를 관장하면서 한 치의 빈틈도 없었기에 궁인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신분이 천하다며 왕후 책봉에 반대했던 신하들도 그녀의 공정함과 단호함, 문제 해결 능력을 접하고는 진심으로 받들게 됐다.
비미호가 왕후로서 자리를 잡아갈 때쯤 야마대국 왕 대언(大彦)의 건강이 나빠졌다. 왕은 자신의 후사로 겨우 다섯 살인 명근(明根)을 지명하고 비미호에게 섭정을 맡겼다. 국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하게 된 왕후는 선정을 펼쳤다. 야마대국 백성은 그녀를 칭송하며 여왕이라 불렀다.
권력의 정점에 선 비미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모를 찾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사람을 보내 부모에게 소식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반가운 답신 대신 그녀의 부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비보를 듣게 된다.
그 당시 신라는 아달라왕이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시절이었기에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해 있었다. 비미호의 부모가 딸을 잃고 비탄에 잠겨 있을 때 관속들이 찾아와 세금을 안 냈다는 이유로 행패를 부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앞뒤 분간을 못 하고 관속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달아난 이들은 군사를 보내 부부를 잡아들였다. 관아로 끌려간 비미호의 부모는 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차례로 숨을 거두었다.
그간의 사정을 들은 비미호는 부모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했다. 그녀는 즉시 신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 갈화성주와 관리들을 처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갈화성주는 권신인 구수혜의 집안사람이었기에 처벌하기 어려웠다. 대신 몇몇 관속들을 징계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비미호는 집요하게 성주의 처단을 종용했다. 그러자 화가 난 아달라왕은 사신을 쫓아냈다.
돌아온 사신으로부터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비미호는 신라에 적개심을 품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신라를 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한편, 백제에서는 개루왕의 뒤를 이어 초고왕(肖古王)이 왕위에 올랐다. 왜의 비미호는 초고왕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백제 왕을 만난 자리에서 왜의 사신은 신라를 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요즘 신라가 알량한 세력만 믿고 이웃 나라를 핍박하여 원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천하의 도리를 안다면 어찌 이를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소국(小國)이 비록 미약하지만 저들을 징치하고자 합니다.”
왜의 대다수 나라는 백제와 신라·가야에서 건너간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의 머릿속에는 삼한(三韓)이 본토라는 생각이 있었다. 야마대국도 안라국을 통해서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신라를 치려면 백제 왕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초고왕은 흔쾌히 윤허했다.
“신라의 무도(無道)가 도를 넘었다. 대국(大國)으로서 이를 지켜만 볼 수 없어 징계하려 했건만 너희들이 짐의 수고를 덜어 준다니 고마운 일이다.”
백제의 허락까지 받은 비미호는 각 소국의 병력까지 그러모은 후 바다를 건너 신라의 갈화성으로 향했다.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내해왕은 이음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나가 싸우게 했다.
비미호는 장군 대록명(大鹿明)을 시켜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갈화성은 신라 동남부의 요충지로 도성이 지척인 만큼 방비가 삼엄했다. 수비병들은 눈빛이 살아 있었고, 성벽 위에는 화살과 돌덩이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공성전에 대비해 수년간 준비해 온 대록명의 군대였지만 공략이 쉽지 않았다.
본격적인 공방전이 시작되자 화살이 하늘을 뒤덮고 사방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나절 내내 전투를 펼쳤지만 양쪽 모두 물러서지 않았다.
왜군이 잠시 공격을 멈추고 쉬고 있을 때 척후병이 달려와 대록명에게 급히 알렸다.
“지금 한 떼의 신라군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신라의 지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은 급히 포위를 풀고 해안으로 물러났다. 자칫하면 양편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왜군이 갈화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는 소식에 이음은 기고만장했다.
“우리 그림자만 봐도 도망칠 놈들이구나. 지금 즉시 쫓아가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베어라.”
신라군이 기세를 올리며 나가는데 한 떼의 왜군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눈에 보아도 형편없는 군세였다.
이음은 창을 꼬나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용기 있는 자 있으면 내 창을 받아라!”
순간, 아찬 윤종(允宗)이 가로막고 나섰다.
“왕자께서는 몸을 보중하십시오. 이런 일은 소장이 맡겠습니다.”
윤종이 창을 휘두르고 달려 나가니 그 기세가 자못 대단했다. 왜장은 겁을 먹었는지 변변히 대적도 못 하고 등을 보인 채 달아났다.
“끝까지 쫓아가 섬멸하라!”
양군이 뒤엉키면서 피 튀기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수많은 군사가 창칼을 맞고 쓰러졌다. 병선(兵船)에 머물러 있던 비미호는 이를 보고 남은 군사를 모두 전장에 투입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좀처럼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비미호는 징을 쳐서 왜군을 병선으로 불러들였다.
온몸에 피 칠을 한 채 돌아온 대록명이 비미호에게 말한다.
“전쟁은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승산이 있을 때 비로소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이번에는 아군이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만 보입니다.”
“그게 뭐요?”
“신라군보다 숫자가 적습니다. 공성전에서는 숫자가 적으면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급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우리는 식량을 조달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니 한시라도 빨리 물러나야 합니다.”
대록명이 이치를 따져 설득하니 비미호도 고집만 부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군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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