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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구수왕이 병을 얻어 몸져눕자 신하들 사이에서 후사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왕에게는 사반(沙伴)과 비류(比流) 두 왕자가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어렸다. 이들 중 하나가 왕위에 오르면 왕후인 해(解)씨가 섭정으로서 권력을 쥐게 되어 있었다. 당시 해씨와 힘을 겨루던 진(眞)씨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백제의 8대 가문 중 하나인 진씨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해씨와는 달리 미추홀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온 토착 세력이었다.
진씨는 일찍이 비류왕(沸流王)에 복속했고, 온조대왕이 한성에 자리 잡은 후로는 그를 도와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왕후를 여러 번 배출하면서 성장한 진씨 가문은 해씨와 더불어 유력한 귀족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진씨의 세력이 커지자 위기감을 느낀 해씨는 집중 견제에 나섰고 이로 인해 두 세력 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구수왕은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가로놓인 골이 너무 깊어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그나마 중립을 지키던 구수왕이 돌아가고 강경파인 왕후 해씨가 섭정하게 된다면 진씨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진씨들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가주(家主) 진충(眞忠)은 일족이 모인 자리에서 대책을 의논했다.
“폐하의 천명이 얼마나 남지 않은 듯하오. 내일 회의에서 후사가 결정될 텐데 아무래도 장자인 사반이 유력하오. 그렇게 되면 왕후가 득세할 테고 우리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거요.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진충의 아우 진물(眞勿)이 나선다.
“가병을 일으켜 해씨를 모조리 잡아 죽이고 새 왕을 옹립하도록 하죠. 제가 은밀히 기른 병사들은 모두 일당백입니다.”
“그것은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백성의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
진충은 무도한 방법을 선호하지 않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눈을 돌려 진가(眞可)에게 물었다. 그는 진충의 둘째 아들로 나이는 어리지만 학식이 높고 지략이 뛰어났다. 앞으로 진씨 일가를 이끌어 갈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
“아버님 말씀처럼 모든 일에는 대의명분이 필요합니다. 거사를 일으키는 데 명분이 없으면 모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후세에 역적으로 매도당할 일입니다.”
진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잇는다.
“선대왕이신 초고왕의 아우 고이(古爾) 왕자는 대업을 도모할 담력과 지혜를 두루 갖췄을 뿐 아니라 덕망이 두터워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민심은 우리 쪽으로 돌아설 겁니다.”
“그가 우리 편에 서줄까?”
“어떻게든 설득해야죠. 왕자의 부인이 우리 족녀(族女)이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사람을 보내 의중을 파악하십시오. 그리고 내일 회의에서 후사를 논의할 때 왕자들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말씀하십시오. 이를 공론화하여 대세의 흐름을 바꿔야 합니다.”
“전례를 볼 때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다른 방책을 강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다른 귀족 가문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어린 사반이 왕위에 오르면 외척인 해씨가 더욱 득세하리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거죠. 그렇게 되면 다른 씨족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우리와 힘을 합치려 할 겁니다. 그렇게 해씨를 고립시키고 명분을 만들어 친다면 기대한 만큼 수확할 수 있을 겁니다.”
진충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했다.
“네 심계(心計)의 끝을 모르겠구나!”
다음 날 진충은 대신 회의에 나아갔다. 이 회의는 조정의 대신과 귀족들이 모여서 나라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는 회의 석상에서 사반 왕자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설파했다.
해씨의 가주인 좌보 해웅(解熊)이 나서서 반박한다.
“그런 전례는 앞서도 있었으니 문제될 것이 없소. 사반 왕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매우 영특하오. 왕후와 대신들이 옆에서 도우면 훌륭히 정사를 이끌어 나가실 거요.”
다른 귀족들도 불만이 있는 듯했으나 해씨의 위세에 눌려 감히 나서지 못했다. 결국 해씨의 의도대로 장자인 사반이 왕위를 잇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진충이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씨의 가주인 목상(木相)이 사람을 보내왔다. 자기 집으로 급히 와 달라는 청이었다. 진충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두려워서 회의에서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들 역시 해씨의 전횡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진충이 목상의 집에 도착하니 장자 목훈(木熏)이 나와서 호젓한 별실로 인도했다. 방 안에는 사(沙)씨·연(燕)씨·백(苩)씨·협(協)씨·국(國)씨 집안의 대표가 모두 모여 있었다.
진충은 짐짓 놀라는 척했다.
“아니, 어인 일로 이렇게 다 모이셨소?”
주인인 목상이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낮에 있었던 회의에서 공의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했소이다. 지금도 해씨가 곳곳에서 판을 치고 있는데 왕후가 수렴청정까지 하게 된다면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겠소.”
다른 가주들도 동감의 뜻으로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회의에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여러분 중 누구도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충이 딴청을 피우자 연씨의 가주인 연백섬(燕百閃)이 침통하게 말한다.
“해씨의 세력이 막강하니 모두 후환이 두려워 침묵을 지킨 것이지 속마음이야 공의 뜻에 십분 동조하고 있소.”
잠자코 있던 국씨의 가주 국태랑(國太郞)이 발끈하며 나선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해씨를 몰아낼 수 있소. 이 자리에서 거수를 세우고 그를 중심으로 뭉칩시다.”
가주들은 너나없이 흥분하며 동의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 힘든 일을 맡겠소?”
진충이 묻자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막상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니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공 말고 누구를 거론할 수 있겠소. 해씨와 맞설 힘이 있는 사람은 진공밖에 없소. 공이 뜻을 세운다면 우리는 무조건 따르겠소.”
목상은 은근히 책임을 떠넘겼다.
진충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인다.
“나같이 어리석은 자가 어찌 그런 어려운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소. 게다가 해씨와 맞서는 것은 자칫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지 않소.”
진충이 슬쩍 몸을 사리자 다른 가주들은 몸이 달았다.
연백섬이 진충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제발 우리를 위해서 중책을 맡아 주시오.”
진충은 세 번을 사양한 후에 비로소 이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고이는 문객들과 함께 정원에 핀 꽃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인재를 아껴서 늘 곁에 두고 어울렸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진가가 나타나자, 고이는 반갑게 맞이한다.
“요즘 통 보이지 않기에 또 뭔가에 홀려서 훌쩍 떠난 건 아닌가 했네.”
진가가 화려한 꽃을 보며 말을 받는다.
“봄바람은 이곳에만 부나 봅니다.”
안부 인사가 끝나자 진가가 고이에게 은밀히 청한다.
“사람들을 물려 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가의 의중을 눈치 챈 고이는 사람들에게 둘러댔다.
“어제 밤잠을 설쳤더니 무척 피곤하군. 그만 일어나세나. 나는 좀 쉬어야겠네.”
고이는 진가를 데리고 침실로 갔다.
“무슨 얘긴데 이리 심각한가?”
“소인은 왕자께서 웅대한 포부를 품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진가의 직언에 고이는 시치미를 뗐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포부라니.”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저는 속이실 수 없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면서 허송세월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때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이는 부정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젠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장자인 사반이 왕위를 계승할 겁니다. 그러면 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겠지요. 그녀는 왕자를 걸림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 할 겁니다. 이리 대책 없이 계시다가는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울 겁니다.”
고이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왕명이 떨어지면 신하된 자로서 받드는 게 당연하지. 어찌 불만을 품겠는가.”
진가는 애가 탔다.
“왕자님의 목숨은 한 개인이 아니라 백성의 것입니다. 해씨가 아닌 모든 귀족과 백성은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폐하의 유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나.”
고이는 끝까지 버텼다.
“해씨에게 정권이 넘어가면 이 나라는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하게 될 겁니다. 지금 좌보 해웅이 하는 짓만 봐도 앞날이 그려집니다.”
해씨의 가주 해웅은 자신의 장원을 넓히기 위해 주변에 있는 백성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원성이 자자했다.
“왕자께서 용단을 내리셔야 이 나라가 살고 백성이 근심을 덜 수 있습니다.”
고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는데 내 어찌 끝까지 사양만 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때가 온 것이었다. 그동안 해씨 일족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정사에는 관심이 없는 척 풍류를 즐기며 살아왔다. 때로는 울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당장은 목숨을 보전하는 게 중요했다.
이제 진씨를 비롯한 귀족들이 자신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산중의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이요, 연못에 숨어 있던 용이 여의주를 문 것이었다. 이젠 산을 뛰어넘고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가 된 것이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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