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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여러 해 흘렀다. 고이왕은 해씨를 비롯한 반대 세력을 포용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백성의 형편을 두루 살펴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구휼했다. 이에 백성은 국왕을 칭송하고 태평가를 불렀다.
하루는 고이왕이 진충을 찾았다.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고 싶구려. 혈구도가 사냥하기 좋다고 하니 그쪽으로 가 봅시다.”
진충은 궁인에게 어가(御駕)를 준비하게 하고 호위 군사들을 집결시켰다. 뒤이어 혈구도주에게 전령을 보내 왕의 행차를 맞을 준비를 하게 했다.
왕이 행차한다는 전갈을 받은 적발구는 곧바로 해우에게 알렸다.
“드디어 기회가 온 듯하네. 고이왕이 이곳으로 사냥을 나온다는군.”
해우의 귀가 번쩍 뜨였다. 용사들을 매복시켰다가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습격하면 쉽게 왕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이왕을 제거하고 사반을 복위시키면 진씨를 쓸어버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해우는 적발구와 의논하여 고이왕을 시해할 계획을 짰다.
이틀 후 국왕의 어가가 혈구도에 당도했다. 적발구는 부두로 나가 왕을 영접했다.
도주부(島主府)에 여장을 푼 왕은 군사들을 쉬게 한 후 진충·진물·적발구 등과 내일 있을 사냥에 관해 의논했다.
“사냥하기에 어느 곳이 좋은가?”
국왕의 물음에 적발구가 아뢰었다.
“혈구산 근처가 좋습니다. 산이 높지는 않지만 골짜기가 많고 숲이 짙어 크고 작은 짐승이 넘칩니다. 게다가 풍치도 좋아 구경하는 맛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니 기대되는군.”
고이왕은 구미가 당기는지 입맛을 다셨다.
저순(猪順)은 적발구 수하에 있던 아장으로 탐욕스러운 자였다. 그는 종종 권력을 내세워 힘없는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다. 백성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혈구도주는 그를 잡아다가 매질한 후 쫓아냈다. 이에 저순은 적발구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다.
고이왕이 혈구도로 수렵을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순은 적발구에게 보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그는 평소에 적발구와 해우가 술을 마시며 고이왕을 저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속내라면 이번 왕의 행차를 두고만 보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저순은 친분이 있는 방얼(方孼)에게 연락을 취해 진충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진충의 심복이었다.
진충은 혈구도주의 수하였던 자가 만나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 당장 데려오게 했다. 진씨의 가주를 만난 저순은 해우가 혈구도에 있고 적발구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저순을 치하하고 돌려보낸 진충은 곧바로 고이왕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오?”
한밤중에 달려온 대신을 보고 왕은 변괴를 직감했다.
“적발구가 역심을 품은 듯합니다.”
진충은 저순에게서 들은 얘기를 소상히 아뢰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당장 혈구도주를 잡아들이십시오.”
고이왕은 군사들에게 적발구를 잡아들이라 명했다.
침소에서 잠을 자던 적발구는 갑자기 들이닥친 군사들에게 포박당했다. 왕 앞에 끌려 나오자 그는 결백을 주장했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적발구는 견디지 못하고 시해 계획을 자백했다. 이를 들은 진충은 왕에게 계책을 내놓았다.
“날이 밝으면 적발구와 닮은 자를 앞세워 폐하의 행차로 꾸민 후 혈구산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 뒤로 정예 군사가 뒤따르다가 매복한 반도들이 어가를 공격하면 덮쳐서 일망타진하면 됩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어가는 예정대로 혈구산을 향해서 나아갔다. 왕의 행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해우 일당은 숲속에 숨어 왕의 행차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해가 중천에 뜨자 어가가 고개를 오르는 게 보였다. 행렬은 기치가 정연하고 웅장했다.
행차가 고개를 넘어섰을 때 숲속에 숨어 있던 해우가 가병을 이끌고 뛰어나왔다.
겁을 먹은 시종과 군사들은 어가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해우는 어가로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철퇴를 휘둘러 박살냈다. 가마가 부서지면서 유혈이 낭자했다. 그는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부서진 가마를 들여다봤다. 피범벅이 된 자는 고이왕이 아니라 적발구였다.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놀란 해우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이때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진물의 군사들이 달려 나와 해우 일당을 에워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우가 달아나려 했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해우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진물이 휘두른 도끼가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해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우두머리를 잃은 반도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앞 다투어 투항했다.
진물은 해우의 목을 베어 고이왕에게 바쳤다.
진충은 왕에게 직언을 올렸다.
“해씨 일족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틈만 나면 폐하의 목숨을 노릴 겁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 군사를 이끌고 가서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고이왕은 진충을 설득했다.
“이 일을 빌미로 해씨 일족을 폐한다면 다른 가문도 우리를 경계하지 않겠소. 정국이 혼란해지면 백성도 불안감을 느낄 것이오. 이번 일은 해우의 독단적인 소행인 듯하니 조용히 덮도록 합시다.”
고이왕은 동행한 모두에게 함구령을 내린 후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정세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요동의 패권을 놓고 위나라와 겨루고 있었고, 가야와 신라는 주변 소국들을 아울러 백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불안한 정세로 낙랑·산동과 안라·왜를 잇는 백제의 교역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고이왕은 교역로를 지킬 강력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때 오랫동안 교역선을 타고 천하를 누비던 왕의 숙부 부여질(扶餘質)이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충의를 소중히 여기고 덕망이 높아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고이왕은 연회를 베풀어 숙부의 귀국을 축하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왕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여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짐이 왕위에 오른 뒤 우리 백제는 선왕 대의 명성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기울게 될 겁니다. 숙부께서는 천하 정세에 밝고 현명하시니 어리석은 조카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부여질이 왕을 위로했다.
“늙은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만 변치 않으신다면 우리 백제는 곧 크게 일어날 겁니다.”
고이왕은 숙부의 확신에 찬 예언에 믿음이 갔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합니까?”
부여질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먼저 귀족의 힘을 누르고 폐하께서 전권을 장악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진씨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합니다. 비록 그들이 폐하를 왕위에 올리는 데 공이 있다고는 하나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견제해야 합니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군(君)과 신(臣)의 구분이 명확해야 합니다. 군신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일관된 정책을 펼치기 어렵습니다.”
왕의 질문은 끊길 줄 몰랐다.
“정사를 잘 살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대신들에게 나라의 주요 업무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철저히 책임지게 하십시오. 그들에게 업무 보고를 직접 받으시고 미흡하면 냉정하게 질책하십시오. 그래야 나라의 체계와 기강이 바로 섭니다. 우리 백제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국정을 장악하고 강력한 의지로 뜻을 펼쳐 나가셔야 합니다.”
“그 다음은 뭡니까?”
“둘째로 국가의 체제를 재정비해야 합니다.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갈라져 나온 탓에 그 체제를 고스란히 답습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현 상황에 걸맞은 체제를 새로이 구축해야 합니다. 관제와 군제를 개편하고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내정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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