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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248년 고구려에서는 동천왕이 세상을 뜨고 태자 연불(然弗)이 왕위에 오르니 제12대 임금인 중천왕(中川王)이다.
중천왕은 국상인 명림어수의 보필을 받아 전쟁에 시달린 백성을 안돈하기 위해 애썼다. 전쟁 피해가 심한 지역에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각 고을의 관장에게 명해 유랑하는 백성이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보살피게 했다.
그해 겨울 국상 명림어수가 왕에게 아뢰었다.
“나라의 근본이 바로 서려면 왕실이 번창해야 합니다. 폐하의 세수(歲壽) 과만하신데도 아직 배필을 맞이하지 못하셨으니 한시라도 빨리 혼례를 치르셔야 합니다.”
중천왕은 국상의 간언에 따라 연나부 출신인 연(椽)씨를 왕후로 맞아들였다.
왕은 내정에 힘쓰는 한편 위나라의 동향을 살피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위군이 다시 쳐들어오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듬해 관나부 부장 척발(拓發)이 딸을 국왕에게 바쳤다. 사람들은 그녀가 관나부 출신이라 해서 관나부인(貫那夫人)이라 불렀다. 그녀는 얼굴이 백옥처럼 희고 눈이 깊었으며 흑발이 아홉 자나 늘어져 있었다. 길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하얀 얼굴과 어울려 빛을 발해서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총애하여 그녀의 침소로 드는 일이 잦았다. 이를 질투한 왕후 연씨는 그녀를 몰아낼 방법을 궁리했다.
하루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왕이 왕후의 침소로 찾아들었다. 오랜만에 왕을 본 연씨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시녀들을 물린 후 왕의 의복을 손수 받아 옷장에 걸고 침상을 정돈했다. 등불이 어른거릴 때마다 그녀의 눈빛도 함께 일렁였다. 몸속에서는 뜨거운 욕정이 넘실거렸다.
“관나를 소후(小后)로 들이려 하오. 왕후가 신경 좀 써 주시구려.”
왕이 내뱉은 말이 불타는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연씨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왕실의 번영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요. 신첩이 두루 살필 터이니 심려치 마소서.”
“현숙한 부인이로고!”
연씨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관나부인을 저주했다.
몇 달이 흘렀다. 국왕 내외와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명림어수가 시중에서 떠도는 소문을 언급했다.
“요즘 위나라에서는 임금이 장발 미인(長髮美人)을 좋아하여 천금을 아끼지 않고 백방으로 구하고 있다 합니다.”
중천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뒤진다 해도 관나만 한 미인은 찾을 수 없을 거요. 그러고 보면 짐은 복도 많구려.”
왕이 관나라는 이름을 입에 담자 왕후는 기분이 상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지난날 위와 싸운 이후로 양국 간의 골이 깊어만 갑니다. 폐하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화해를 도모하신다면 저들도 머리 숙여 받아들일 겁니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면 천하가 태평할 겁니다.”
“왕후의 뜻이 아름답구려. 그럼 무엇을 내세우면 저들이 화친을 받아들일 것 같소?”
왕후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위주가 장발 미인을 구한다고 하니 나라 안을 뒤져서 찾아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중천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을 겨냥한 얘기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왕후가 중궁으로 돌아가고 둘만 남게 되자 중천왕은 명림어수에게 물었다.
“왕후가 소후를 미워하고 있는 것 같지 않소?”
“그런 듯합니다.”
“짐은 이제껏 왕후가 후덕하여 소후를 포용하는 줄 알았소. 앞으로 궁이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명림어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뢰었다.
“왕후는 왕실의 기둥입니다. 기둥이 흔들리는데 어찌 집인들 온전하겠습니까. 각별히 신경을 써 주셔야 합니다.”
중천왕이 보기에는 왕후의 편을 드는 말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명리어수도 연나부 출신이다 보니 그럴 수 있었다. 그것이 왕의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왕후와 관나부인의 갈등이 심해지면 연나부와 관나부의 충돌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 미리 진화하지 않으면 내궁의 암투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날 대전에서 있었던 일은 시녀의 입을 통해 관나부인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닥치기 전에 왕후를 몰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어 왕이 침소로 들자 관나부인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맞이했다. 왕과 눈이 마주친 순간 투명한 진주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어찌 우는 게냐?”
관나부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서럽게 울기만 했다. 답답해진 왕이 언성을 높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를 않느냐?”
그제야 관나부인은 얼굴을 들고 왕에게 하소연했다.
“낮에 왕후께서 저를 부르시기에 갔더니 이리 말씀하시더이다. ‘천박한 계집이 왕의 총애만 믿고 언감생심 중궁을 노리느냐! 너 스스로 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더니 매를 들어 신첩을 모질게 쳤습니다.”
관나부인은 옷을 걷어 등과 팔에 난 상처를 보였다. 이를 본 왕은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왕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관나부인은 더 크게 흐느끼며 말했다.
“신첩은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곳에서 한시라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달랬다.
“왕후가 순간 화가 나서 그런 모진 말을 했을 거다. 본심은 악한 사람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음 날 중천왕은 홀로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두 여인의 불화를 이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이쯤에서 궁내의 기강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왕은 시녀들에게 은밀히 명해 왕후와 관나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보고하게 했다.
며칠 후 중천왕이 심복들과 함께 기구(箕丘)로 사냥을 떠났다.
관나부인은 시녀 초화(草花)를 불렀다.
“사람 하나는 족히 들어갈 가죽 부대를 구해 오너라.”
초화는 영문을 몰라 관나부인을 쳐다봤다.
“냉큼 찾아오지 않고 뭘 하느냐?”
관나부인의 호통에 놀란 초화는 잰걸음으로 궁을 빠져나갔다.
시녀가 가죽 부대를 가져와 바치자 관나부인은 주위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폐하께서 사냥에서 돌아오실 때쯤 내가 이 부대 안에 들어갈 테니 너는 주둥이를 끈으로 묶은 후에 궁인들을 시켜 중문(中門)으로 운반토록 해라.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발설 시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초화는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 지나 왕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다. 신하들의 인사를 받고 내궁으로 들어가려는데 궁인들이 가죽 부대를 들고 중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궁인들은 왕을 보자 쩔쩔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냐?”
“왕후 폐하의 명을 받고 가죽 부대를 바다에 버리러 가는 길입니다. 안에 든 게 뭔지는 소인들도 모릅니다.”
궁인들은 초화가 일러준 대로 대답했다.
왕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대 안에 있던 관나부인은 신음 소리를 냈다. 이를 듣고 왕은 가죽 부대 안을 확인하게 했다.
궁인들이 묶은 끈을 풀자 입에 재갈이 물린 관나부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재갈을 풀어 주자 관나부인은 숨을 헐떡이며 왕에게 말했다.
“왕후가 신첩을 가죽 부대에 집어넣더니 바다에 버리라고 했습니다. 곧 죽을 목숨이 천행(天幸)으로 폐하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나부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땅을 치고 통곡했다.
“신첩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곳에는 무서워서 하루도 머물 수 없습니다.”
관나부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왕이 시녀 초화를 불러 물었다.
“소후의 말이 모두 사실이냐?”
관나부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초화는 모든 것이 왕후의 흉계라 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왕후를 쫓아낸 뒤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절로 났다.
초화가 차갑게 아뢴다.
“폐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소후가 꾸민 일입니다. 왕후 폐하를 무고해서 쫓아내려는 수작입니다.”
믿었던 초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경악할 수밖에 없는 폭로였다.
관나부인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중천왕은 크게 노하여 관나부인을 꾸짖었다.
“감히 왕후를 무고하고도 살기를 바랐단 말이냐? 그렇게 바다로 들어가는 게 소원이라면 내 당장 들어주마!”
중천왕은 호위병에게 관나부인을 다시 부대에 집어넣어 서해(西海)에 던지라고 명했다. 군사들은 관나부인을 가죽 부대에 넣어 들고 나갔다. 관나부인의 처절한 외침이 온 궁성 안에 메아리쳤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초화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녀는 마침내 언니 소화(蘇花)의 복수를 해낸 것이다.
어릴 때 궁에 들어온 소화는 총명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관나부인의 질투로 말미암아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초화는 왕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지난날 소화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뢰었다. 그녀의 얘기를 들은 왕은 소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애석해 했다. 중천왕은 시종에게 명해 소화의 제사를 지내 혼령을 위로하게 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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