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1º
습도 85%
춘천 11º
습도 95%
)
모용희는 장수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거란족과 더 싸워 봤자 득보다 실이 많을 듯하오. 용성으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한 후에 고구려를 치도록 합시다.”
모용희가 속내를 털어놓자 장수들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생업에 매달려야 할 백성을 징병해서 이 먼 곳까지 데려올 때는 언제고 그냥 돌아가자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장수들이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자 왕후 부씨가 참다못해 나섰다.
“이번에도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간다면 백성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겁니다. 가뜩이나 조정 안팎으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다른 방책이 없지 않소!”
연왕이 볼멘소리를 하자 왕후가 해법을 제시했다.
“저들의 성을 빼앗는다면 면목이 서지 않겠습니까. 제가 들으니 고구려 목저성에 보급 창고가 있다 하더이다. 이곳을 불시에 기습하면 고구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식량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신성이나 요동성은 고구려 국경의 요충지로서 방비가 굳건할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비가 허술한 배후의 목저성을 노리자는 생각이었다.
왕후는 무예만 출중한 게 아니라 강단과 기지를 갖춘 여자였다. 독불장군인 모용희도 그녀의 말은 항상 경청했다.
북방의 추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후연군은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행군했지만 기나긴 원정길 탓에 수많은 군마가 탈진하거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후연 군사들이 힘겹게 먼 길을 우회하여 목저성에 이르렀을 때는 도저히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고구려군과 싸우기도 전에 추위와 배고픔에 견디지 못했다. 더구나 목저성이 요동성이나 신성보다 규모가 작고 방비가 허술하다고 하지만 행군하는 동안 상당한 전력을 잃은 연군을 막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용희는 이를 악물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몇 차례 성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많은 희생을 치르고 물러서야 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나니 더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연군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그들이 국경을 넘어 침입했다는 소식이 신성과 요동성·남소성 등에 전해졌을 테니 곧 구원군이 몰려올 것이었다. 지금도 고전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원군이 당도한다면 연나라 군대는 사면초가의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퇴로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용성으로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당장 후퇴해야 했다.
모용희는 부씨의 말에 따른 것을 후회하며 군사들에게 퇴각을 명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기에 왕후나 다른 장수들도 반대할 수 없었다.
이때 용성에서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왕이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떠난 후 도성의 수비를 맡고 있던 중위장군 풍발이 좌위장군 장흥 등과 결탁하여 모용희를 몰아낼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풍발은 선왕 모용보의 심복이었다. 모용희가 왕위를 찬탈하고 걸림돌이 된 왕자까지 모두 죽이자 그를 몰아낼 마음을 품었다.
풍발은 모용희에게 충성을 다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세력을 규합했다. 무능력한 모용희에게 불만이 많았던 대신들은 풍발의 회유에 넘어가 역모에 가담했다.
모용운은 풍발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 체했다. 모용희가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이 연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모용희는 많은 군사를 잃고 간신히 용성으로 돌아왔다. 이번 원정에서도 고구려에 복수하기는커녕 죄 없는 군사들만 희생시켰다.
나라 안에서 왕에 대한 비난 분위기가 고조되자 위협을 느낀 모용희는 금위군을 강화하고 백성에게 신망이 두텁거나 자신을 비판하는 신하를 숙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용희는 도성 내에 풀어 놓은 간자에게서 풍발과 장흥이 세를 규합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그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이를 눈치 챈 두 사람은 재빨리 도성을 빠져나가 건평으로 달아났다.
그 후로 모용희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당연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연왕이 실정을 거듭하자 유력한 부족장들이 등을 돌렸다. 무리한 원정으로 아비와 자식·형제를 잃고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덮을 듯했다.
건평에 숨어서 돌아가는 사정을 살피던 풍발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는 진황도로 가서 예전에 친분이 있었던 유주 자사 여진을 만났다.
“소인을 비롯한 연나라 백성은 항시 태왕 폐하의 은혜에 감복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흉측한 모용희가 백성의 뜻을 무시하고 상국에 반기를 든 겁니다. 저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은 거사를 일으켜 반역자 모용희를 처단하고자 합니다.”
여진은 언변이 좋은 풍발의 말을 듣고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갈 리 없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인데, 이번 일로 태왕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셨소. 지금 연나라를 멸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계셔서 내가 어떻게 보고를 드려야 할지 난감하오.”
여진은 태왕의 진노를 내세워 은근히 상대를 위협했다. 이 말을 듣고 풍발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여진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말을 이었다.
“태왕께서 모용운 공을 아끼신다 들었습니다. 이번 거사 후에 그를 왕좌에 앉히면 어떻겠습니까?”
원래 거사가 성공하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생각이었지만 풍발은 이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모용운을 왕위에 앉혀 고구려의 예봉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풍발은 한인(漢人)이었지만 전장을 누비며 많은 공을 세웠기에 중위장군이라는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모용씨의 세상에서 이민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고위직에 오른 그였기에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한 것이었다.
여진은 일을 성사시켜 보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풍발은 크게 기뻐하며 진황도를 떠나 용성으로 말을 달렸다.
모용운은 후원의 화초 사이에서 봄바람에 몸을 맡긴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조국 고구려는 봄바람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인상이 뇌리에 깊이 박혀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바다로 나온 연어처럼 끊임없이 조국으로 향하는 자신의 본능을 느끼고 있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려면 거친 파도를 뚫고 살아남아야 했다.
모용운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용성으로 돌아왔을 때 부친은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가 택했던 길이 과연 옳았을까? 자신의 방식으로 지키고자 했던 고구려인의 긍지가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 있을까?
모용운은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부친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를 지울 수 없듯이 조국 또한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마치 탯줄 자국으로 영원히 몸에 남는 배꼽과 같은 것이었다.
“주공,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모용운은 집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뉘시냐?”
집사는 주위를 경계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풍발 장군입니다.”
모용운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풍발은 폭풍 속에서 만나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사내였다.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려 하다가는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파도를 거스르지 말고 물결을 타고 넘어야 했다.
모용운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사랑채로 나아갔다. 그가 들어서자 풍발이 일어나 예를 갖췄다. 오랜 도피 생활로 얼굴이 많이 상했고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굳은 모습을 보면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모용운은 내색하지 않고 풍발을 반갑게 맞이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모용운은 평소 그의 지략과 담력을 인정했다. 풍발 역시 모용운의 덕성과 강단을 높이 평가했다. 두 사람은 서로 벗으로 여기고 자주 왕래하며 친분을 나누었다.
“공(公)께서 이 나라를 위해 일어나셔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모용희의 실정으로 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가 피땀 흘려 세운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무능한 왕과 대신들이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소생은 공의 마음속에 우국충정이 들끓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왕을 몰아내고 난세를 바로잡는 데 앞장서 주십시오.”
풍발은 모용운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상대가 역모를 권유하자 마음속에 파문이 일었다. 드디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좋소. 내 어찌 백성의 신음을 외면할 수 있겠소. 장군과 뜻을 함께하리다!”
모용운은 희망 없는 국왕을 버렸다. 그는 이 나라를 조국인 고구려처럼 모든 민족이 차별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곧 먼 타지에 끌려와 고생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새로운 조국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번 거사를 통해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모든 거사 준비를 끝내 두었기에 이제 남은 일은 적당한 시기를 잡는 것뿐이었다. 풍발은 모용운과 의논을 마친 후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때마침 왕후 부씨가 세상을 떠났다. 부씨의 죽음으로 모용희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기둥마저 사라졌다. 왕후를 잃은 그의 상실감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왕후의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모용운은 이제 숨겨 왔던 발톱을 꺼낼 때가 왔다고 여겼다. 그는 풍발과 의논한 끝에 장례식을 틈타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풍발은 동생 풍소불, 종형 풍만니, 장흥 등 함께 결의한 20여 명의 동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들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각자의 위치에서 모용운의 신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비탄 속에서 성대한 영결식이 치러졌다. 운구가 성 북쪽에 있는 왕실 묘지로 이동했다. 국왕과 대신들이 눈물을 흘리며 뒤를 따랐다.
장례 행렬이 중황문(中黃門)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모용운은 효시를 쏘아 곳곳에 있는 반란군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일제히 창칼을 들고 달려나와 중황문을 장악했다. 수문장 조낙생은 반군의 기세에 놀라 성문을 버리고 모용희에게 달려갔다.
조낙생의 보고를 받은 모용희는 분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동행했던 금위군을 이끌고 서둘러 중황문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성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