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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희가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이 역적놈들아! 어서 문을 열고 나와 짐의 칼 아래 목을 늘이거라!”
풍발이 성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우리가 성을 완전히 장악했다! 살고 싶거든 군사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 자리에 무릎 꿇어라! 그리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모용희는 풍발을 노려보며 노발대발했다.
“너 따위가 감히 짐을 능멸하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무사치 못하리라!”
모용희는 금위군에게 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적들이 성벽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풍발은 냉소를 띠며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성벽 위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화살을 날렸다. 성벽을 향해 뛰어오르던 왕의 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굴었다.
잠시 후, 성벽 위에서 깃발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성 밖 수풀에 매복해 있던 풍만니의 군사가 일제히 떨치고 일어나 금위군을 공격했다. 금위군은 후연군 중 최정예라 일컬어지는 부대였지만 예상치 못했던 기습을 당하자 변변한 반격조차 못 하고 무너졌다. 수많은 군사가 도륙을 당하는 가운데 연 왕 모용희는 호위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모용희가 한참을 도망쳐 용등원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 무사가 그의 뒤로 따라붙으며 다급히 외쳤다.
“곧 추격병이 당도할 겁니다. 폐하의 복장이 남들이 이목을 끄니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어디서 구했는지 평민의 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장례를 위해 차려입은 상복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모용희는 급히 말에서 내려 호위 무사가 건넨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숲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 사이 무사는 왕이 벗어놓은 옷을 입고 천리마에 올라타서 도망쳤다.
추격군의 선두에 선 풍소불은 앞서 달리는 연왕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안장에 걸어 둔 활을 빼 들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재주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풍소불은 말이 달리면서 몸이 흔들리는 박자에 맞춰 모용희의 등을 조준하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연왕의 등이 불규칙하게 출렁이는 듯하더니, 육중한 몸이 말 등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풍소불은 오랜 추격 끝에 짐승을 잡은 사냥꾼과 같은 희열을 느꼈다. 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용희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윽고 그가 느꼈던 희열이 낙담으로 변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연왕이 아니었다. 모용희는 사라지고 엉뚱한 사내가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다.
풍소불은 사내에게 국왕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풍소불은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화풀이라도 하듯이 칼을 들어 사내의 목을 내리쳤다. 사방에 핏방울이 뿌려졌다.
“부근을 샅샅이 뒤져라!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자를 찾지 못하면 너희도 이 꼴이 될 줄 알아라.”
풍소불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가리키며 독기를 내뿜었다. 그의 부하들은 벌벌 떨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움막에서 모용희를 찾았다. 그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서력 407년, 후연의 시어사 이발(李拔)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 환도성에 도착한 사신은 궁궐에 들기에 앞서 대장군 고타하의 집을 찾았다.
고타하는 이발이 찾아왔다는 말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소.”
“양국의 화평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생이야 대수겠습니까.”
“고운 공께서 왕위에 오르셨다니 참으로 경하드릴 일이오. 앞으로 양국의 관계가 돈독해지리라 믿소.”
“이번 사신행의 목적도 태왕 폐하께 그 일을 아뢰고 정식으로 윤허를 받는 겁니다.”
제후국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는 패권국의 허락이 필요했다. 연의 왕위에 오른 고운은 고구려의 태왕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화북 지역에서 여러 나라가 쟁패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명실상부 동북 제일의 강국이었다. 북위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후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힘에 의존해야 했다.
모용희가 죽고 나자 풍발을 비롯한 반군의 장수들은 모용운을 추대하여 천왕(天王)으로 옹립했다. 왕위에 오른 모용운은 국호를 대연(大燕)으로 정하고 성을 모용씨에서 고씨로 고쳤다. 자신이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이때 고구려는 숙군성을 중심으로 요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고운은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고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몰락해 가는 연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처남이자 심복인 이발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던 것이다.
고운은 떠나는 이발에게 태왕을 알현하기 전에 고타하를 먼저 만나라 일렀다. 지난날 용성에서의 담판 이후, 서로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서신 왕래를 통해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운 공의 등극 소식을 듣고 태왕께서도 매우 기뻐하셨소. 윤허를 받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거요.”
고타하의 장담을 듣고도 이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소? 안색이 어둡소.”
사신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의 어리석은 걱정일지 모르겠으나 풍발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지금 대연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자입니다. 만약에 딴마음을 품는다 해도 왕께서 달리 막아낼 방책이 없습니다. 폐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괘념치 말라고만 하시니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연왕께서도 달리 생각하는 게 있으실 거요. 그리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시지 않소.”
“제 걱정이 어리석은 노파심에 머문다면 좋겠습니다.”
“혹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숙군성에 있는 우리 군대가 언제라도 도우러 달려갈 것이오.”
이발은 그제야 표정이 밝아졌다.
“그저 대장군만 믿겠습니다.”
사신은 주인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이발은 궁으로 들어갔다. 시위의 안내를 받아 편전으로 들어서니 광개토태왕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반갑게 맞았다. 전장에서 갑옷 입고 있을 때와는 달리 인자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고운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보다 경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짐은 언제라도 대연을 종족(種族)의 예(禮)로 대할 것이니 이를 만방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종족의 예로 대연을 대하겠다는 뜻은 옛날 서방의 천자가 동성(同姓)의 제후를 대하듯 대연을 고구려와 피를 나눈 제후국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누구라도 대연을 공격하면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응징하겠다는 선포였다.
이발은 태왕의 관대한 배려에 머리를 조아려 감사했다.
광개토태왕은 그 자리에서 고운에게 태대형(太大兄)의 직위를 내리고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이로써 대연은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거듭났다.
“연나라가 우리에게 복속했으니 이를 발판으로 화북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오. 근 몇 년간 우리 용맹한 장수들이 여러 차례 있었던 백제의 준동을 진압하여 남방이 안정되었소. 하지만 서방은 여러 나라가 패권을 다투느라 혼란한 상황이오. 지금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오.”
태왕이 대대적인 서방 원정을 천명하자 고타하가 나섰다.
“신 고타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후연 원정 이후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 못한 군사들은 한시라도 빨리 전장으로 나가 용맹을 뽐내고자 합니다. 다행히 몇 해에 걸친 풍년으로 백성의 생활이 풍족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화북 원정에 나설 적기입니다. 다만, 우리가 서방 원정에 나서면 제일 먼저 상대해야 할 적은 북위입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말해 보시오.”
광개토태왕은 고타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서방에서는 많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북위의 세력이 가장 강합니다. 북위왕 탁발규는 뛰어난 지략과 웅대한 포부를 지닌 자입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량을 모두 쏟아야 합니다. 더구나 북위를 치기 위해서는 연나라 영토를 지나야 합니다. 비록 폐하를 향한 연왕 고운의 충성심이 깊다고는 하나 나라 안에서의 그의 기반은 모래성처럼 미약합니다. 만일 북위 원정 중에 연나라에서 정변이라도 일어나서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한다면 진퇴양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대장군의 상황 분석은 예리했다.
광개토태왕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떤 방책을 세워야겠소?”
“소신의 생각으로는 먼저 진황도 유주부(幽州府)의 직할 통치를 강화하고 이를 거점으로 북위 정벌을 모색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진황도는 비사성에서 해로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서 물자를 공급하기 쉽습니다. 또한 유사시에는 우리 군사를 안전하게 후퇴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백제가 요서와 산동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주변에 영향력이 행사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백제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넓힌 나라였다. 원활하고 안전한 교역을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지역 거점과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왜 등 여러 지역에 거점이 될 도시를 건설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점 도시는 주변 지역을 영향력 아래 두게 됐다.
고타하는 광개토태왕에게 과거 백제가 행했던 것처럼 거점 도시를 제안한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상업보다는 군사적 필요로 세워지는 도시라는 것이었다.
광개토태왕은 고타하의 구상에 동의했다. 원거리에 있는 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보급이 중요했다. 유주부를 강화한다면 바닷길을 통해서 원정군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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