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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자사 여진은 노을이 번지고 있는 산해미(山海尾) 항구를 바라봤다. 황혼을 보고 있자니 문득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갔다. 모용성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마저 생명에 위협을 느껴 도망칠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의 뛰어난 영도력 아래 고구려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여진은 고구려인으로 다시 태어나 위대한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할 따름이었다. 오래도록 권력을 누릴 줄 알았던 모용희는 결국 죄의 대가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 비해 자신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세상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어느덧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태왕을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불사르고 싶었다. 그래서 유주자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일흔이라는 나이도 잊고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부두는 늦은 시간인데도 물건을 하역하는 인부들로 붐비고 있었다. 산해미는 남방에서 용성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항구였다.
용성은 예로부터 중원과 북방의 여러 나라를 잇는 동북의 상업 중심지였다. 비록 연의 힘이 약화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바닷길을 따라 산해미까지 가서 육로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산해미도 매우 번화한 항구가 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이 산해미와 가까운 진황도에 유주부를 설치한 것도 이러한 경제적·지리적 이점을 고려해서였다.
여진은 지원 나온 군사를 동원해서 성을 쌓았다. 해변에 선착장과 초소를 만들어 선박들이 자유롭게 들고날 수 있도록 하고 주변 연안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서방의 혼란이 극에 치닫자 무주공산이 된 연안에는 해적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각 나라는 해적을 소탕하기는커녕 이들을 받아들여 전쟁에 투입하기까지 했다. 장사를 위해 각지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인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라 간의 잦은 전쟁으로 육로가 막힌 상황에서 해적의 출현으로 바닷길마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됐으니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상인들은 세상이 안정되기만을 손 놓고 기다리거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상인들의 애로를 잘 알고 있던 여진은 진황도를 장악하고 나서 군선을 이끌고 발해만을 돌며 해적을 소탕했다. 간자를 인근 지역 곳곳에 잠입시켜 해적 소굴을 알아낸 후 일거에 쳐들어가 잔인할 정도로 단호하게 섬멸했다.
고구려 수군의 소탕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해적들은 발해만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됐다. 바다에 평화가 찾아오자 상인들은 앞다투어 유주 자사 여진의 은덕을 찬양했다. 이때부터 천하 각지의 상인들이 진황도로 모여들었고 그 덕분에 이곳은 교역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유주부의 영향력은 발해만 일대에 광범위하게 미쳤다. 주변 지방의 토호들은 여진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 휘하에 들어가길 자청했다.
유주부가 예상보다 빨리 자리를 잡자 광개토태왕은 계획대로 북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얼마 전 북위가 연으로부터 빼앗은 연군이 첫 목표였다. 태왕은 5천의 철기군을 포함한 군사 5만을 배에 태우고 비사성을 출발해 진황도에 이르렀다.
여진은 광개토태왕을 반갑게 맞이하여 상좌에 모셨다.
“그대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유주부의 명성이 천하를 뒤덮고 있다는 소식을 짐도 익히 듣고 있었소. 이처럼 직접 와서 보니 과연 그렇구려.”
태왕은 단시간 내에 유주부를 키운 공을 크게 칭찬했다.
여진은 황송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이 폐하의 홍복입니다. 소신에게 어디 자그마한 공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대는 부분노(扶芬奴)나 을파소(乙巴素)에 버금가는 인물이오.”
부분노는 동명성왕부터 유리명왕 대까지 충성을 바친 무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유리명왕 대에는 고구려 영토를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던 선비족의 땅으로 쳐들어가 그들의 도성을 빼앗고 항복을 받았다. 그 공으로 식읍을 하사 받았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이후로 그는 청렴과 충절의 표상으로 후세에 귀감이 됐다.
을파소는 고국천왕 대에 안류의 추천으로 국상으로 발탁됐다. 그 당시 국왕은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나라의 변혁을 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사한 그는 귀족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새로운 정치와 경제 질서를 수립했다. 그는 국상으로 재직하면서 빈민 구제를 위해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소신이 어찌 그러한 영웅과 현인의 발꿈치라도 따라가겠습니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짐은 이제 서토(西土)를 향해 첫발을 내디디려 하오. 만약 이번 출정에서 목표를 이룬다면 우리의 후손은 오늘을 기리게 될 것이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앞으로만 가십시오.”
“그대가 뒤에 버티고 있으니 든든하구려.”
“망극합니다.”
두 사람의 열정과 믿음이 한데 뭉쳐지자 방 안이 열기로 가득찼다.
유주부를 떠난 광개토태왕은 군사를 이끌고 연군으로 내달렸다. 연군은 본디 후연 땅이었지만 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북위가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었다.
연군 태수 탁발명은 고구려군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랐다. 그는 북위의 도성인 평성에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주변에 있는 성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백호기를 앞세운 고구려 철기병의 매서운 공격을 막아 내기는 어려웠다. 연군을 비롯해 광녕·상곡·어양·범양·대군·북평 등이 순식간에 고구려군의 말발굽 아래 차례로 짓밟혔다.
동쪽 변경 지역에 고구려군이 침입했다는 보고가 평성에 당도했다. 하지만 당시 북위 조정은 내우외환에 허덕이고 있었기에 구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여전히 건재한 후진·남연과의 충돌이 계속되는 가운데 병고(病苦)로 정신이 맑지 않은 탁발규가 많은 신하를 함부로 죽였기에 북위의 조야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곳곳에서 모반을 일으키는 자가 속출했다. 난국을 헤쳐 나가기도 벅찬 상황에서 변방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고구려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우려했던 대연의 정변이었다. 대연왕 고운이 심복이었던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 의해 시해당한 것이었다.
고운이 후연의 왕좌에 오르기는 했지만 권력의 실세는 풍씨 일족이었다. 풍발은 시중이자 무읍공으로 국사를 결정하는 데 전권을 행사했고 동생 풍만니는 상서령, 풍소불은 무군대장군, 풍홍은 정동대장군 등의 중요한 관직을 제수받았다. 게다가 건평에서 풍발을 숨겨 주었던 손호는 상서좌복야, 모용희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장흥은 보국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풍발의 측근이 조정을 모두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운은 풍발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부터 자신이 허수아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자신의 의지로 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왕위에 오른 고운은 은밀히 풍발에 맞설 세력을 키워 나갔다. 신변 보호를 이유로 장사들을 모아 호위 무사로 삼고, 이들을 중심으로 금위군을 양성했다.
고운은 연나라의 전통을 이어 나갈 것이라 천명하여 왕족들의 환심을 사고, 모용귀를 비롯한 모용씨를 등용하여 풍씨에 대항할 세력을 구축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그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이러한 고운의 움직임은 풍발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성격이 온화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왕위에 옹립한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풍발은 사방에 심어 둔 간자를 통해서 고운의 동태를 보고 받고 그가 순한 양이 아니라 발톱과 이빨을 숨기고 있는 맹수임을 깨달았다. 이후로 풍발은 조심스럽게 고운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이듬해 5월, 고운은 풍씨 일파를 지방관으로 파견했다. 점점 약해지는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명백한 좌천이며 풍씨 세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다.
상서령 풍만니를 비려로 내려보내고 후임으로 자신의 측근인 무은제를 임명했다. 중군장군 풍유진은 병주목으로 삼아 백랑으로 보내고, 무군대장군 풍소불은 실권이 없는 사례교위로 낙점했다. 풍발로서는 수족(手足)이 모두 잘린 꼴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시중 풍발은 인척인 종사중랑 왕수를 시켜 왕의 측근을 은밀히 만나게 했다.
왕수는 풍발의 명을 받고 많은 재물을 풀어 가며 고운 왕의 측근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호위총관 이반과 도인은 항상 왕의 곁을 지키는 최측근이었다.
왕수는 이반과 도인을 밀실로 불렀다.
“언제까지 호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소? 당신들도 언제든 토사구팽을 당할 수 있소.”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언제든 왕의 마음이 바뀌면 그들은 찬밥 신세가 될 것이었다.
“고운만 없애 준다면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소.”
두 호위는 이리처럼 물욕이 넘치는 자들이었다. 왕수로서는 이미 상대를 파악하고 미끼를 던진 것이기에 실패할 리가 없었다.
비극은 왕궁의 동당에서 벌어졌다. 정무를 마친 고운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동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위를 물리치고 서책에 파묻혔다. 책을 읽으며 온종일 쌓였던 피로를 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짚었다.
이때 밖에서 호위 이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급한 장계가 있어 전하고자 합니다.”
고운은 책을 덮고 호위를 안으로 들게 했다. 이반은 두루마리가 올려진 서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의 허리에는 고운이 하사한 보검이 꽂혀 있었다. 호위 무사였기에 왕 앞에서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도인이 이반의 뒤를 따랐다.
고운이 서반 위의 두루마리를 집어 들려 할 때였다. 이반이 갑자기 들고 있던 서반을 던지더니 허리에 찬 보검을 뽑아 왕을 내리쳤다. 고운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재빨리 몸을 날려 칼날을 피했다. 그는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휘둘러 상대가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이반이 실패하자 도인이 칼을 뽑아 들고 고운의 뒤로 돌아갔다. 그의 칼이 왕의 등을 벴다. 미처 뒤쪽까지 방비할 틈이 없었던 고운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이를 놓칠세라 이반이 고운의 가슴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이렇게 해서 거사는 성공으로 끝났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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