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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이 시해당하던 시간에 풍발은 홍광문에 올라 궁 안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을 시해한 이반과 도인은 수하 무사들을 이끌고 왕궁을 점거했다.
이를 지켜보던 심복 장태가 풍발에게 달려와 아뢨다.
“왕을 죽였으니 이제 소임을 다한 겁니다. 저자들을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습니다.”
풍발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장태가 이끄는 군사들과 대면한 호위 무사들은 상황이 이롭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은 재빨리 몸을 빼내 달아났다. 큰 상을 기대했던 이반과 도인은 절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장태의 군대가 포위망을 좁혀 오자 이반은 군사 몇 명을 쓰러뜨리고 서문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서문을 통과하지도 못한 채 기다리고 있던 풍발의 수하 이상의 일격에 목이 달아났다. 밀려드는 장태의 군사들과 격전을 벌이던 도인 역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이반과 도인이 일으킨 변란은 풍발에 의해서 쉽게 제압당했다.
궁 안에서 변괴를 전해 듣고 달려온 대신들은 풍발이 신속한 대처로 변란을 진압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뒤늦게 달려온 이발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풍발에게 물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자들이니 멀리하시라고 그렇게 아뢰었건만 말씀을 듣지 않으시더니 이런 끔찍한 변을 당하신 게 아니오.”
이발은 풍발이 배후라고 확신했지만 딱히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국왕의 유고 시에는 시중이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었기에 풍발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번 일은 나라의 큰 재앙이오. 이 일로 우리가 혼란에 빠진다면 주변국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폐하를 시해한 흉악한 자들은 죽었소. 어서 새로운 왕을 세워 백성의 동요를 막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것이오.”
이발 등 고운의 측근들이 진상 조사를 주장했지만 시중은 그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풍발은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연이라 함으로써 모용씨의 계보를 잇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혔다. 이 나라에서 모용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풍발은 즉위한 후 고구려와의 우호 관계를 청산한다고 선언했다. 고구려에 대한 고운의 저자세 외교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다수의 모용씨는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는 단지 모용씨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만은 아니었다. 광개토태왕이 고운이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태왕이 북위 원정에 나가 있을 때 고구려를 압박함으로써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이 무렵 범양을 휩쓸고 있던 광개토태왕은 후연에서 정변이 일어나 고운이 죽고, 풍발이 왕위에 올랐다는 첩보를 들은 후 철군을 결심했다. 연나라가 더는 우방이 아니라면 배후에 적을 두고 있는 셈이었다. 자칫하면 협공을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일단 군사를 철수하여 유주부로 향했다. 그는 진황도에 머물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광개토태왕이 돌아오자 유주자사 여진이 어두운 얼굴로 맞이했다.
“사태가 어찌 돌아가고 있소?”
“반란을 일으킨 무사들은 진압되었고 풍발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사건의 배후에 풍발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좌시할 수 없소. 짐을 믿고 몸을 의탁한 자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이미 저쪽에서 선수를 쳤습니다. 풍발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고구려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우리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장 군사를 이끌고 가서 용성을 치겠다!”
광개토태왕은 매우 격앙된 상태였다.
“폐하, 잠시 소신의 말을 들어 보소서. 물론 제대로 맞붙는다면 연나라 따위가 우리 적수가 되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랜 원정으로 지친 상태인 데다가 북위가 조만간 내홍을 수습하고 반격해 올 겁니다. 더구나 이제 곧 겨울이 닥쳐올 테니 당장 연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무리 고구려군이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천하의 강군이라 해도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게 되면 많은 희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는가?”
광개토태왕은 분기를 가라앉히고 방책을 물었다.
“소신이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결과 풍발은 우리와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저 현재 상황을 이용해 폐하의 책임 추궁을 면하고 국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강수를 두었을 뿐입니다.”
여진의 판단은 이치에 합당했다. 광개토태왕은 한동안 심사숙고했다. 태왕은 자신의 주장만 밀어붙여서는 안 됐다. 막강한 권한을 가졌기에 그 권한을 잘못 휘두르면 나라에 큰 재난을 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신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광개토태왕은 이윽고 침묵을 깼다.
“용성으로 사신을 보내라!”
방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고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신년이 되자 연군·범양을 비롯해 유주부에 속한 각 군의 태수가 유주자사 여진에게 하례를 올리기 위해 찾아왔다. 태수를 비롯한 고관들의 화려한 수레와 예물을 실은 달구지가 줄을 이어 유주부에 당도했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광범위한 지역에 널리 미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열세 명의 태수가 늘어선 가운데 여진이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상공에 대한 예로서 읍을 하는 태수들을 바라보는 여진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이 환도성으로 돌아간 후로 여진은 늘어난 관할 지역을 정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들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보기에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구나 혼란에 휩싸여 있던 북위가 차츰 안정을 되찾으면서 유주부를 향한 위협이 증대되고 있었다.
북위는 탁발규가 죽은 뒤 잠시 내분에 시달렸지만 장자인 탁발사(拓跋嗣)가 이를 수습하고 즉위했다. 탁발사는 나라를 안정시킨 후에 아버지의 유훈이었던 화북의 통일을 공언하고,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연군 일대의 땅을 다시 찾으려 했다.
한편, 풍발이 왕위에 오른 이후 점차 안정을 되찾은 북연도 익주·평주·유주·청주 등의 지역에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로써 유주부는 양쪽에서 수세에 몰리는 신세가 됐다. 비록 주변국들이 광개토태왕의 위명에 겁을 먹고 함부로 쳐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빈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언제든 군사를 일으킬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태수들 역시 고구려의 힘에 눌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북위나 북연이 공격해 온다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자들이었다.
여진은 마음을 다잡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의 결의도 저승사자 앞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신년을 축하하는 잔치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여진은 부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늦게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매달려 노심초사한 것이 화근이었다.
여진의 시신은 평양성에서 멀지 않은 무악산 서쪽 옥녀봉 남단 구릉 위에 자리 잡은 무덤으로 옮겨졌다. 지난날 여진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치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이곳의 경관에 매료되었다.
그 후 광개토태왕의 명을 받고 진황도로 떠나게 된 그는 자신의 식솔들에게 이곳에 무덤을 만들라고 일렀다. 길을 떠나면서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도성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일흔다섯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진의 영구가 도착하자 무덤은 웅장한 자태로 일행을 맞이했다. 널방에 놓인 관대에 시신이 안치됐다. 앞방 안벽에는 묵서로 그를 기리는 내용의 묘지명을 새겨 넣었다. 널방 벽에는 13군의 태수가 여진에게 배례하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로써 그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영광의 순간을 영구히 보존토록 했다.
여진의 죽음 때문에 유주부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됐다. 광개토태왕은 급히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던 연고야를 유주 자사로 임명해 진황도로 보냈다. 하지만 그로서는 여진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정세의 균열을 가장 먼저 포착해 내는 것은 이(利)에 민감한 상인들이었다. 유주부가 흔들리자 그들은 진황도에서 청주로 교역 거점을 옮겼다. 상인들이 떠나자 호황을 누리던 유주부도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래도 진황도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기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도성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화북(華北)을 공략할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정상 군사를 물렸지만 북연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원정에 나설 생각이었다. 천하를 아우름으로써 많은 사람이 평화로운 세상을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태왕의 굳센 의지는 멈추거나 포기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소신이 있었고, 그를 믿고 따르는 군사와 백성이 있었기에 자신감이 절로 샘솟았다.
광개토태왕은 원정길에 나서기에 앞서 내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를 할 필요가 있었다. 명림자부(明臨子夫)를 비롯해서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임무를 충실히 해내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태왕이 오랜 원정으로 도성을 비우는 데 따른 백성의 동요가 걱정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중원으로의 원정에 앞서 백성을 안심시키기 위해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임명하고 내정을 맡겼다. 거련은 광개토태왕의 장남으로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체격이 크고 기개가 남달랐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충심으로 따랐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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