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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이후 정비된 고구려의 형법은 매우 엄격했다. 모반을 꾀한 자는 산 채로 불태운 후, 시신의 목과 팔을 베는 육시형에 처했고, 그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다. 전투에서 도망친 자, 투항자, 살인자, 겁탈자도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한 자는 12배로 보상해야 했으며, 그럴 능력이 없으면 노비로 팔려가야 했다.
이런 엄격한 법이 있다 한들 그것이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없었다. 거련은 왕궁에서 특권을 내세워 이를 어긴다면 백성 역시 법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측근에게도 냉정하게 법을 적용했다. 그게 지도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라 믿었다.
한동안 거련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히 살핀 광개토태왕은 그가 거대한 왕국을 이끌어 나갈 자질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이에게 관대했다. 공사(公私)를 구분할 줄 알았으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갖고 있었다. 여러 부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필요한 덕목을 부족함 없이 갖추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거련에게 내정을 맡긴 후 안심하고 원정을 준비했다. 그런데 북방의 부여인들이 고구려에 반기를 들면서 서방 정벌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고구려 동북쪽에 있는 동부여는 대무신왕 이후로 근 4백 년을 고구려에 복속하여 살아왔다.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동부여를 모국으로 인정하고 이 지역을 신성시했다. 그래서 그곳의 군장들에게 많은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런 이유로 동부여의 여러 부족은 그동안 별다른 소요 없이 고구려의 속민으로 지냈다.
그런데 5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부여에 주변을 압도하는 기상과 여러 부족을 하나로 아우를 만한 역량을 갖춘 압로(鴨盧)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미구루(味仇婁)였다.
미구루는 여성(餘城)을 도성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국호를 부여라 한 후에 고구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는 옛 부여 땅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고구려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왔다.
그동안 백제와 후연과의 전쟁으로 여념이 없던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구루는 이 틈을 노려 사방으로 영역을 넓혔다. 급기야는 북부여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다. 북부여의 수사 모두루(牟頭婁)는 도성으로 파발을 띄워 미구루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고하는 한편 용담산성(龍潭山城)의 방비를 더욱 강화했다.
북방에서 날아온 급보를 받은 광개토태왕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토벌에 나서기로 했다.
서력 410년, 광개토태왕은 3만의 군대를 인솔하여 부여로 향했다. 빠른 속도로 북상한 태왕의 군대는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세력을 확장한 탓에 자만심에 빠져 있던 미구루의 군사들은 고구려 철기병의 가공할 위력에 눌려 패전을 거듭했다.
고구려군은 파죽지세로 미구루의 본거지인 여성으로 향했다. 미구루는 맹장 단사루(單社婁)에게 여러 부족에서 차출한 군사 3만을 주고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게 했다.
단사루가 이끄는 군대는 속말수 상류의 평원에서 고구려군과 마주쳤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부여의 혼성군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압도당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고구려군의 일방적인 공세 속에서도 단사루는 끝까지 저항했다. 망루에 올라 전황을 살피던 광개토태왕은 포위망 속에서도 거침없이 전장을 누비는 적장의 용맹한 모습을 보았다. 태왕은 군사들에게 그를 생포하라고 지시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갈고리를 써서 단사루가 탄 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말이 쓰러지자 부여의 장수도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단사루가 끌려오자 광개토태왕은 군사들을 물리치고 손수 결박을 풀어 주었다.
“장군의 명성을 듣고 마음으로 흠모해 왔소.”
태왕은 패장을 귀빈의 예로 대접했다.
단사루는 평소 동북의 패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광개토태왕을 존경해 왔다. 그런 상대에게 패배를 당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태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부여 최고의 장수라 일컬어지는 단사루가 고구려로 전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성을 지키고 있던 부여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미리 침투시켜 놓은 간자의 보고로 성 안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광개토태왕은 미구루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미구루는 고구려 사신을 꾸짖어 쫓아낸 후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신하 대부분이 이를 반대했다. 사흘이 지나도 부여의 군신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광개토태왕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장 성문을 열지 않으면 공격할 것이고, 그때부터는 어떠한 관용(寬容)도 바라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부여의 대신들은 한밤중에 압로의 침전으로 쳐들어갔다. 순식간에 미구루를 결박한 후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을 맞이했다.
광개토태왕이 편전에 들어서 옥좌에 자리를 잡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미구루를 끌고 왔다.
“너는 어찌하여 상국에 반기를 들었느냐?”
태왕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봤다.
미구루는 앙연히 대답했다.
“부여는 고구려의 아버지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기로서니 어찌 아들이 아버지 위에 군림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세상의 이치를 바로잡고자 일어났을 뿐입니다.”
태왕은 치기 어린 사내에게 일침을 날렸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무릇 달은 차면 기울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부모도 늙으면 장성한 자식의 뜻을 따라야 하거늘, 너는 어찌 이를 부정하려 하느냐!”
미구루는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광개토태왕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구루의 죄를 용서하고 도성으로 데리고 갔다. 그 뒤 그는 태왕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다.
광개토태왕은 동부여 정벌에서 64개의 성과 1천4백 개의 촌락을 평정했다. 그간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동부여는 사라지고 부여의 백성 역시 고구려인으로 거듭났다.
서력 412년,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지 22년째 되는 해였다. 정월 초하루에 대소 신료들이 신년 하례를 위해 대전에 늘어서 있었다. 서토를 정벌하고 동부여마저 완전히 병합하는 성과를 거두었기에 이번 하례식은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광개토태왕은 청룡(靑龍)과 백호(白虎)·현무(玄武)·주작(朱雀) 사신(四神)이 금박으로 수놓인 천사신포(天四神袍)를 입고 백라관을 쓴 모습으로 대전에 나타났다. 태왕이 들어서자 모든 신하가 경배했다. 태왕이 답례하며 옥좌에 앉자 궁중 악단의 축하 연주가 흘러나왔다. 다섯 마리의 백학(白鶴)이 아름다운 선율에 취한 듯 춤을 추며 날아왔다.
신하들의 얼굴에는 새해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이 가득했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칭송받는 광개토태왕이 올해는 어떤 목표를 제시하고 실현해 나갈지 예상해 보는 일도 자못 즐거웠다. 신하들의 눈과 귀는 온통 태왕에게 쏠려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태왕이 일어서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천신의 자손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는 천도가 어그러짐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신성한 나라 고구려를 세우셨다. 그분 생전에 유일한 아쉬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영천신제(迎天神祭)를 지내지 못한 것이다. 짐은 예전 부여 동명왕(東明王) 이후 오랫동안 맥이 끊겼던 영천신제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이 막중한 대사를 치르기로 한 것은 고구려의 만년대계를 위함이니라. 여러 대신은 제사를 거행함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라!”
영천신제를 부활시키겠다는 태왕의 선언에 신하들은 매우 놀랐다.
영천신제는 초대 단군 이후로 역대 단군이 천신을 모셨던 제사로, 서방의 봉선제(封禪祭)에 비견할 만큼 권위가 있는 행사였다. 그러나 부여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 이후로는 명맥이 끊긴 상태였다.
영천신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주변국으로부터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어떤 나라도 주변국을 압도하지 못했기에 감히 영천신제를 지내지 못했다. 역대 고구려 왕도 부족 행사인 동맹(東盟)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동맹은 동명(東明)이라고도 불리는데, 추모성왕과 그의 생모인 하백녀에게 풍년을 비는 일종의 농제(農祭)였다.
고구려 제6대 임금인 태조왕은 영천신제를 추진하기 위해 최고의 학자이자 훗날 신선이 된 백두선인(白頭仙人)에게 기록을 모아 정리하게 했다. 비록 봉행하지는 못했지만 선인의 노력은 영천신경(迎天神經)이란 책으로 남았다. 당시 왕은 완성된 책을 왕실에서 중요한 서책을 모아두는 곳인 장문고(藏文庫)에 보관했다.
광개토태왕은 태자 시절 장문고에서 책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영천신경을 발견했다. 그 내용에 깊이 빠져든 태왕은 언젠가는 영천신제를 부활시키겠다는 웅대한 꿈을 품게 됐다. 이는 천하를 제패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광개토태왕이 영신신체를 거론하자 대전에는 한동안 짙은 적막이 감돌았다.
태자 거련은 지금은 영천신제를 지낼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고구려의 태왕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긴 하지만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후 20여 년간,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야·숙신·거란은 물론 북연까지 제후국으로 삼았고, 동부여를 흡수했다. 이제 동북 지방에서 고구려를 넘볼 나라는 없었다.
태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화북 진출을 꾀했었다. 이때 화북에서는 북위(北魏)를 비롯해 후진(後秦)·서진(西秦)·하(夏)·남량(南涼)·북량(北涼) 등의 나라가 서로 맞물려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북위가 가장 강성했지만 화북 전역을 아우를 힘을 갖지는 못했다.
광개토태왕은 먼저 북위를 제압한 후에 다른 나라를 차례로 굴복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북연과 동부여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번번이 뒤로 미루어졌다.
거련은 올해야말로 부왕이 화북 정복의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갑자기 영천신제를 거행한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태자는 부왕의 갑작스러운 결정에는 태양대선인(太陽大仙人)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 짐작했다. 그가 홀연히 나타나 태왕을 만난 후에 영천신제 얘기가 나왔으니 의심할 만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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