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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대선인은 북부여에서 살아 있는 신선으로 떠받들어지는 인물이었다. 왕이나 제후도 어지간해서는 그가 이끄는 천사수련단(天師修練團)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가 지난가을 몸소 광개토태왕을 예방한 것은 백성에게 큰 화젯거리였다.
수행처를 쉽게 떠나지 않는 태양대선인이 태왕을 찾게 된 이유에 대해서 억측이 난무했다. 그중에서도 불교의 승려들이 광개토태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유하며 극찬한 것이 대선인의 마음을 움직인 거라는 추측이 가장 힘을 얻었다.
어쨌든 역대 고구려왕이 거듭 청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선인이 자발적으로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광개토태왕의 위상은 높아졌다.
더구나 대선인이 태왕을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영천신제를 지내게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은 광개토태왕이야말로 진정한 천신의 자손이며 인간 세계의 참 주인이라고 우러러봤다.
태양대선인이 광개토태왕에게 영천신제를 권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대선인이 환도성으로 온 목적은 태왕에게 영천신제를 봉행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태왕은 거듭 자신의 미흡함을 말하며 고사했지만 대선인은 이를 겸양으로 받아들였다.
“짐이 과연 영천신제를 지낼 자격이 있소?”
“위대한 태왕이시여! 폐하가 아니면 누가 영천신제를 봉행할 수 있겠습니까. 옛 조선의 역대 단군님과 부여의 동명왕 이후로 패업(霸業)과 성업(聖業)을 두루 성취하신 분은 오직 폐하뿐입니다.”
“짐은 아직 천하를 평정하지 못했소. 수양 또한 선현들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오.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이룬 후에 이 문제를 거론합시다.”
“폐하께서는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모두가 하늘의 뜻이니 받아들이십시오. 제가 천기를 살펴보니 올해 동맹제 때 천신의 감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은 고민에 빠졌다. 천신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고구려 왕으로서 천신과 직접 소통할 기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불혹의 나이가 된 그였지만 대선인의 유혹을 단호하게 떨쳐낼 수 없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광개토태왕은 결심을 굳히고 태자 거련을 불렀다.
“영천신제를 지내기로 했다. 짐은 앞으로 제를 준비하느라 바쁠 터이니 태자가 나랏일을 맡도록 해라.”
거련은 부왕의 결심을 듣고 못내 불안했다. 모든 계획을 뒤로 미루고 갑자기 제례를 서두르는 것이 마치 죽을 날을 받은 사람 같았다.
광개토태왕은 주변국에 사신을 보내 영천신제의 부활을 알리고 각국 왕과 제후에게 초청장을 전했다.
백제 전지왕(腆支王)은 고구려의 환도성으로 가는 것이 꺼려졌다. 그렇다고 태자를 대신 보낼 수도 없었다. 전지왕이 직접 참석하지 않으면 국왕의 격에 맞는 호대명천단(昊大明天壇)이 아닌 제후가 서는 대명천단(大明天壇)에 자리를 배정하겠다고 고구려 측에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해상대국을 자부하는 백제가 왜·거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진지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상좌평(上佐平) 여신(餘信)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우리만 영천신제에 불참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참석해야 한다면 여러 나라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고구려와의 결속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백제의 위상을 드높이는 길입니다.”
백제 왕은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상좌평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진지왕은 고구려에 진헌사(進獻使)를 보내 금단목기를 바치고 영친신제 때 제기로 사용해 줄 것을 청했다. 금단목기는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박달나무를 깎아서 만든 그릇으로 백제의 특산품인 황칠수 수액을 발라 황금빛이 났다. 이 그릇은 황금에 비견할 만큼 값진 물건이었다.
최상의 제기를 찾던 제관부의 관리들은 백제에서 보내온 공물을 받고 매우 흡족했다. 백제의 뒤를 이어 신라에서도 화려한 금잔과 옥잔을 바쳤고, 왜국에서는 야명주(夜明珠)와 마노석, 그리고 대형 호박, 북연에서는 최상품 비단 수만 필을 보내왔다.
영천신제 준비에 몰입한 광개토태왕은 매일 몸을 정결히 하고 영천신경에 기록된 바를 실천했다. 먼저 화기(火氣)를 억제하고 화식(火食)을 피했으며 의식을 주관하는 대선인과 함께 매일 심법 수련을 했다.
광개토태왕이 제사 준비에만 매달렸기에 나라의 대소사는 모두 태자의 몫이었다. 거련은 나라 살림을 관장하면서 영천신제가 국고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많은 나라가 영천신제에 즈음하여 값비싼 진상품을 보내왔지만 그리 달갑지 않았다. 주변국이 공물을 진상하면 상국인 고구려에선 그보다 귀한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물이 늘어갈수록 고구려의 국고는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자다가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눈을 뜬 고타하는 움츠렸던 몸을 펴며 일어났다. 여전히 방 안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듯했다. 한기가 밀려오는 쪽을 보니 창문 한쪽이 열려 있었다. 고타하는 그제야 자신이 또 책상머리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타하가 왕명을 받고 영천신제 준비에 매달린 지도 어언 8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늦은 밤까지 제관부 등 영천신제 관련 관청을 돌아다니며 준비 상황을 살피고 조율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밤늦게 돌아와서도 여러 서류를 검토하느라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무쇠 같은 체력을 자랑하던 고타하였지만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지금에 와서는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고타하는 얼굴이 꺼칠해질 만큼 고된 나날을 보냈지만 힘들다는 말 한마디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영천신제에 대한 광개토태왕의 열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태왕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보고 고금에 찾아볼 수 없는 충신이라 평했지만, 태왕에 대한 고타하의 감정은 충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굳이 따진다면 육친의 정보다도 깊고,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도 간절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타하가 오로지 왕명 때문에 영천신제에 온 힘을 쏟고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에도 고구려를 천하에 우뚝 세우고 싶다는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타하는 창문을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어느덧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듯 제법 바람이 찼다. 이제 보름만 지나면 마다산(馬多山)을 향해서 깃발을 날리며 달리게 될 것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변괴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후 하인이 침소로 들어오더니 침통하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실신하셨으니 서둘러 입궐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순간 고타하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휘청거렸다. 평생 잔병치레조차 없을 정도로 강건했던 광개토태왕이었지만 그동안 영천신제 준비를 위해 화식을 끊고 낟알과 채소만으로 끼니를 연명하느라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다.
고타하는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말에 올라 단숨에 대궐로 달렸다. 어제 오후 영천신제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만 해도 멀쩡하던 태왕이 실신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궁문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고타하는 태왕의 침전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태자를 비롯한 왕후와 근신들이 참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고타하의 물음에 왕후가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축시(丑時)쯤에 정전에서 침소로 돌아오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소. 어의의 말로는 과로와 영양 결핍이 겹쳐 정신을 잃으신 거라 하오.”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소.”
고타하는 당장 태양대선인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가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태왕이 건강을 해쳐 가며 심법 수련에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침상 옆에서 태왕의 상세를 살피던 태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고타하는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 기뻐하며 침상으로 달려갔다.
정신을 차린 광개토태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주변에 서 있는 사람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의가 태왕의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대고 새어 나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대장군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하십니다.”
어의가 태왕의 명을 전하자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나갔다. 고타하는 누워 있는 왕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무래도 짐의 천수가 다한 듯하구려.”
광개토왕은 얼마간 기력이 돌아왔는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 영천신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빨리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셔야지요.”
“짐이 이제껏 순탄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천명(天命)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이오. 근래 영천신제를 서두른 것도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서였소.”
태왕은 힘에 겨운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짐이 장군에게 한 가지 청이 있소.”
“말씀만 하십시오. 소신의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받들겠습니다.”
대장군의 뜨거운 충정이 고스란히 전해졌기에 태왕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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