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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이번 영천신제 때 천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것이오. 내게 했던 것처럼 태자에게도 충성을 다해 주시오. 거련은 왕의 재목으로는 손색이 없으나 아직 다 자라지 못했소. 태자가 온전한 아름드리로 클 때까지 옆에서 지켜 주기 바라오.”
태왕은 힘겹게 고타하의 손을 잡았다. 고타하의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토록 기고만장했던 귀족들도 광개토태왕의 뛰어난 정략과 기개 앞에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뛰어난 영도력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은 권위 의식으로 가득 찬 귀족들조차 충성스런 신하를 자처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태왕 개인의 역량에 의지한 바가 컸다. 그가 타계한다면 모처럼 강화되었던 왕권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인의 결속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지속적인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왕권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이을 거련이 귀족들을 누르고 태왕의 권위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물론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거련은 태왕으로서 천하를 아우를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질을 제대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햇빛과 양분이 필요했다. 광개토태왕은 그 역할을 고타하가 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고타하는 태왕의 신뢰에 보답하고 싶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태자만큼은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시월상달 초하루, 아홉 달에 걸쳐 모든 준비를 끝낸 광개토태왕은 영천신제를 치르기 위해 마다산에 도착했다. 마다산은 고구려 산 가운데 가장 웅장했다. 산봉우리에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고, 골짜기마다 안개가 뒤덮고 있는 영산이었다. 신선이 사는 산으로 알려져 약초꾼만이 간간이 드나들 뿐 일반 백성은 출입을 삼갔다. 다만, 일 년에 한 번 동맹 행사를 치를 때만 주변의 백성이 마음 놓고 모여들었다.
제단으로 향하는 산길을 따라 인파가 줄을 이었다. 선두에는 광개토태왕과 태양대선인이 서고, 태자 거련과 백제의 전지왕·신라의 실성왕·북연의 풍발왕을 비롯한 왕과 제후·거수·족장들이 뒤를 따랐다.
태왕 일행이 제를 위해 마다산 기슭에 마련된 별궁인 천지궁에 이르렀을 때는 앞서 파견된 제관부의 관리와 시종들이 모든 행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지친 태왕 일행은 천지궁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는 많은 방이 있어서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궁 안에서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은 숙소에 머물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신성한 제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몸과 마음의 정화(淨化)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음 날, 광개토태왕은 천지궁에서 중요한 의식을 치렀다. 궁의 중앙에는 냉천(冷泉)과 온천(溫泉)이 있었다. 냉천은 마다산 꼭대기인 천지(天池)에서 흘러내려 온 차가운 물이 모이는 곳이고, 온천은 마다산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른 뜨거운 물이 고이는 곳이었다. 태왕은 제사를 주관하기 전에 냉천과 온천을 오가며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몸을 정화했다.
영천신제 당일인 초사흘 새벽, 광개토태왕은 일행을 이끌고 천지궁을 나와 지신곡(地神谷)으로 갔다. 천지궁에서 동쪽으로 몇 리쯤 떨어진 낭떠러지 아래에 자리한 지신곡에는 거대한 돌방이 있었다. 돌방의 내부는 무려 천여 명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무저혈(無低穴)이 두 개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영천신제에 앞서 지신(地神)의 정기(精氣)를 받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 태왕과 왕후는 주요 부위만 흰 비단으로 가린 채 맨몸으로 무저혈로 들어갔다. 대선인이 영영경(永永經)의 주문을 외웠다.
태자 거련을 포함해 천여 명의 사람이 부복한 가운데 한 시각이 흘렀다. 대선인이 주문 외우기를 멈추자 무저혈 속에 있던 태왕과 왕후가 밖으로 나왔다.
태왕은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사신(四神)과 황룡이 수 놓인 천오신포(天五神袍)를 입었다. 천오신포는 고구려 왕이 동맹 행사 때 입는 옷으로 제사장을 상징하는 무복(巫服)이었다. 왕후도 칠채금옥화포(七彩金玉花袍)를 걸쳤다. 두 사람은 인간계를 벗어나 천계에 당도한 듯한 모습이었다.
지신곡을 나선 광개토태왕은 군중을 거느리고 인신단(人神壇)으로 향했다. 인신단은 마다산 산마루에 자리 잡은 넓은 평지에 설치된 삼각형의 제단으로, 지신계와 천신계를 잇는 통로였다. 세모난 제단 아래 각국에서 온 군주가 부복하고 있었다. 태왕은 무리를 가로질러 제단 앞에 당도했다. 단 위로 오르는 계단의 수는 모두 아홉 개로, 고구려와 8방의 제후를 나타냈다.
광개토태왕이 제단에 오르자 각국의 군주와 신하들이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 사배구고(四拜九叩)의 예를 올렸다. 태왕은 태자를 비롯해 인신단에 오른 36국의 군주와 72명의 제후, 108명의 신하에게 일일이 축수를 행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모든 예를 마친 태왕은 인신단에서 천신단(天神壇)으로 올랐다. 천신단은 사격형의 제단이 9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마치 하나의 웅장한 탑처럼 보였다. 전체 높이가 270척이고 위로 갈수록 층의 높이가 줄어들었다.
천신단은 크게 하천단·중천단·상천단으로 구분됐다.
하천단은 아랫부분부터 가신단(家神壇)·동신단(洞神壇)·산육신단(産育神壇)의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신단은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집터를 돌보는 터주신·집안의 재복과 횡액에 관여하는 업신·집안의 으뜸신으로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성주신·조상신·아이를 점지하고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신을 모시는 자리였다. 동신단은 산신·강신·서낭신·당신 등 산천과 마을을 지키는 신을 모신 자리였다. 산육신단은 불을 관장하는 수신(燧神)·농업을 관장하는 신농(神農)·대장장인 단야신(鍛冶神)·수레바퀴를 만든 제륜신(制輪神)·숫돌로 상징되는 마석신(磨石神) 등 문명과 생업을 수호하는 신들을 모신 자리였다. 이처럼 하천단은 인간과 어울려 살아가는 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었다.
광개토태왕은 하천단을 지나 중천단으로 올랐다. 왕후와 태자·대선인, 그리고 각국의 군주와 제후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하천단을 넘어섬으로써 인간계를 떠나 천계로 들어선 것이었다. 하천단에 올랐던 108명의 대신은 천계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에 멈춰 서서 관등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대신들은 각기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제단 앞에 섰다. 제단에는 말·소·돼지·개·양 다섯 고기와 쌀·보리·조·콩·기장 다섯 곡식, 그리고 그 밖에 색색의 다섯 가지 나물과 과일이 진설(陳設)되어 있었다.
중천단은 하천단과 마찬가지로 아래부터 명천단(明天壇)·대명천단(大明天壇)·호대명천단(昊大明天壇)의 3개 층으로 되어 있었다.
명천단은 동쪽의 청룡(靑龍)·서쪽의 백호(白虎)·남쪽의 주작(朱雀)·북쪽의 현무(玄武), 이렇게 사방을 수호하는 사신(四神)을 모신 곳이었다.
청룡은 오행 중 목(木)의 속성을 가지며 오상(五常)에서 인(仁)과 연관됐다. 해가 떠오르는 동방의 수호자로서 탄생과 성장을 의미했다. 사계로 치면 봄에 해당했다. 백호는 금(金)의 속성을 가지며 의(義)와 연관됐다. 해가 지는 서방의 수호자로서 수확과 결실을 의미했다. 사계의 가을에 해당했다. 주작은 화(火)의 속성을 가지며 예(禮)와 연관됐다. 따뜻한 남방의 수호자로서 풍요와 번영을 의미했다. 사계의 여름에 해당했다. 현무는 수(水)의 속성을 가지며 지(智)와 연관됐다. 차가운 북방의 수호자로서 양을 나타내는 뱀과 음을 나타내는 거북이 합쳐져 음양의 조화를 통한 우주 재생의 원리를 보여 줬다. 북방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계로는 겨울에 해당했다.
사신은 천하를 지키는 수호자일 뿐 아니라 28수(宿·별)의 현신으로서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명천단에 이르자 태왕을 따르던 제후 일행들이 18명씩 나뉘어 각 방위에 도열했다. 동쪽 제단에는 푸른색·서쪽에는 흰색·남쪽에는 붉은색·북쪽에는 검은색 비단으로 만든 제복이 놓여 있었다. 제후들은 각기 자신의 앞에 놓인 제복을 걸치고 하늘을 향해 현신을 아뢰었다.
태왕은 사방을 둘러보고 다시 대명천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명천단은 28수의 별자리를 모시는 곳이었다. 28수는 하늘의 적도 주변에 자리한 별자리로 적도의 동서남북에 각기 7개씩 배치되어 있었다. 28수의 별자리는 그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섭리와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신성시됐다.
제단의 동쪽에는 각(角)·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 북쪽에는 두(斗)·우(牛)·여(女)·허(虛)·위(危)·실(室)·벽(壁), 서쪽에는 규(奎)·루(婁)·위(胃)·묘(昴)·필(畢)·자(觜)·삼(參), 남쪽에는 정(井)·귀(鬼)·유(柳)·성(星)·장(張)·익(翼)·진(軫) 7수의 신이 모셔졌다.
광개토태왕은 달의 움직임을 좇아 서쪽에서 시작하여 28수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 나니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것처럼 눈빛이 맑고 깊어졌다.
태왕은 생기를 되찾은 듯 호대명천단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왜를 비롯해 거란·실위·말갈 등 각 부족의 28명 군주는 제관이 일러주는 대로 28수의 제단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성신(聖神) 각각의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주관했다.
광개토태왕은 어느덧 호대명천단에 발을 들여놨다. 이제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고는 왕후와 태자·대선인, 그리고 백제와 신라·가야 등 여덟 나라의 군주뿐이었다.
호대명천단은 북쪽에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쪽에 남두육성(南斗六星), 그리고 동쪽에 해신, 서쪽에 달신을 모신 곳이었다.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머리부터 차례로 천추(天樞)·천선(天璇)·천기(天璣)·천권(天權)·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으로 불리며 죽음을 관장했다. 남두육성은 북두칠성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두수(斗宿)라 불리며 삶을 주관했다.
해와 달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며 인간의 근본이자 뿌리였다. 추모왕이 일월지자(日月之子), 즉 해와 달의 자손이라 불릴 정도로 해와 달은 신성한 존재이자 경배의 대상이었다.
태양대선인은 광개토태왕을 해의 자리인 동쪽에, 왕후를 달의 자리인 서쪽에 세웠다. 그리고 태자를 북두칠성의 자리인 북쪽에, 백제왕을 비롯한 군주들을 남쪽에 세웠다. 제단의 동쪽에는 세발 까마귀, 서쪽에는 두꺼비와 옥토끼, 그리고 계수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또한 북쪽에는 북두칠성, 남쪽에는 남두육성이 새겨져 있었다.
대선인이 주관한 가운데 천하의 평화와 백성의 강녕을 기원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제향이 타오르고 사방에 연꽃이 흩뿌려졌다. 제단에 마련된 커다란 화로에 불길이 오르더니 순결한 어린 사슴이 제물로 던져졌다. 대선인의 독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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