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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대명천단에서의 의식이 끝나자 대선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태왕 폐하와 왕후 폐하만 저 문을 통과해서 상천단으로 오르실 수 있습니다.”
대선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상천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문으로 막혀 있었다. 그 문에는 연꽃과 불꽃, 구름무늬 등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을 한 새와 물고기인 인두조어(人頭鳥魚)와 기린, 나는 물고기인 비어(飛魚), 불새, 괴수 등이 그려져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대선인의 뒤를 따라 왕후와 함께 천문(天門)을 향해 올랐다. 이를 지켜보는 군주들의 얼굴에는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특히 백제 전지왕은 다른 이들보다 더 안타까웠다. 지난날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더라면 지금 상천단에 올라 천신을 만나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었다.
광태토태왕은 천천히 한 걸음씩 상천단의 문으로 올라갔다. 그의 걸음에 맞춰 거문고와 비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 장중하고도 아름다운 곡조가 전지왕의 쓰린 마음을 달래 주었다.
백제 전지왕은 호대명천단에서 남방의 남두육성에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았다. 그는 어느새 욕심을 버렸는지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에 비해 태왕과 왕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태자 거련의 얼굴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지금이 아버지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로는 위대한 천하의 패자이자 자랑스러운 부친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터였다.
태자는 부왕이 떠난 이후가 걱정이었다. 그가 이뤄 놓은 광대한 제국을 자신의 힘만으로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거련은 호대명천단에 오른 군왕들을 보면서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서방의 주요 나라에서 불참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구려의 위력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태자나 삼공(三公) 정도의 사신단도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고구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에 앞으로 언제든 도전해 올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따라 상천단에 오르는 왕후의 얼굴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잠시 후면 태왕과 함께 현생(現生)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태자 거련은 걱정할 필요 없이 믿음직했지만 아직 어린 왕자와 공주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천신의 감응을 받아 영원히 자손들을 보살피리라 다짐했다.
대선인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앞서 걸었다. 천문에 다다르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대선인이 문으로 들어서고 태왕과 왕후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다시 닫혔다.
상천단은 아래부터 선천단(僊天壇), 영천단(永天壇), 태천단(太天壇) 순으로 되어 있었다. 선천은 우주 자연의 신보다 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신들이 사는 곳을 의미했다. 이곳에는 고등신(高登神)인 추모왕, 부여신(扶餘神)인 유화성모 등이 살았다. 영천은 영원한 자유를 얻는 곳으로 인간이 죽어서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태천은 천신인 환인(桓因)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선천단에 올라선 광개토태왕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각양각색의 천인과 선인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보관을 쓴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천인, 상반신을 드러낸 채 짧은 치마를 입고 하늘을 나는 천인, 머리 위로 귀가 자라나고 몸에 깃털이 난 선인, 학을 타고 구름을 헤치며 날아다니는 선인 등 수많은 천인과 선인이 공중을 수놓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손에 고·완함·장소·횡적 등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악기를 들고 있었다.
대선인이 넋을 놓고 있던 태왕을 일깨웠다.
“제가 오를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영천은 천신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정화한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곳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천신의 허락을 받은 태왕 폐하와 왕후 폐하만이 드실 수 있는 곳입니다.”
태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선인은 태왕과 왕후에게 신선들이 쓰는 보관(寶冠)을 내밀었다. 이는 영천단으로 오를 수 있는 신분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보관을 받아 쓴 태왕과 왕후는 영천단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공중을 날아다니던 천인과 선인들이 두 사람을 축복하듯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이었다. 태왕과 왕후는 마치 바람을 탄 듯 구름을 밟는 듯 몸이 가벼워졌다.
뒤에 남은 대선인은 천신께 드릴 제사를 준비했다. 백마(白馬)와 백호(白虎)가 제단에 놓였다. 이 영물들은 수년의 노력 끝에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드디어 제의(祭儀)가 시작됐다. 제악이 흐르는 가운데 대선인은 천신을 향해 예를 올렸다. 뒤이어 영천신경을 독송했다. 그 소리와 궁중 악단이 연주하는 영신악(迎神樂)이 어우러져 마다산에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아래 제단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신의 강림을 기원했다.
이윽고 태왕과 왕후가 영천단에 올랐다. 태왕은 온후하면서도 청량한 기운을 느꼈다. 영혼이 육신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찬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태왕은 얼굴을 돌려 왕후를 봤다. 그녀의 얼굴에서도 광채가 발산되고 있었다.
선천단에서 천신영락악(天神永樂樂)이 들려왔다. 태왕과 왕후는 영천단 위에 좌정했다. 이는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천신의 품에 귀의하는 의식이었다.
선천단에서의 제의가 모두 끝나자 태왕과 왕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태천단으로 올랐다. 두 사람은 드디어 천신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태왕은 마음속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기쁨으로 충만했다.
태천단 위에는 신수(神樹)가 자라나 있었다. 태왕과 왕후는 신수로 다가가 손을 대고 천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얼마 후,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날이 어두워졌다. 날씨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마다산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제단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천신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징조라고 여겼다. 대선인도 잠시 독송을 멈추고 하늘을 봤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줄기 상서로운 빛이 먹구름을 뚫고 태천단을 비췄다. 뒤를 이어 성채보다 큰 황룡(黃龍)이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더니 천신단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태천단에 있는 태왕과 왕후를 태우고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다.
먹구름이 걷히자 대선인은 중천단에서 뛰어온 태자와 함께 태천단으로 올라갔다. 제단 위에는 태왕과 왕후의 육신만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해 보였다.
그날 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광개토태왕은 평생을 바쳐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천하를 건설했다. 이는 그의 염원이자 무거운 책무였다. 태왕은 천신과 만난 후에야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태왕은 앞으로 달리면서도 늘 주변을 돌아봤다. 덕분에 태왕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였고 이들과 함께 대제국을 창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태왕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굴레가 되기도 했다.
굴레를 벗어던진 태왕은 천계로 가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말을 달렸다. 그는 고구려의 위대한 혼(魂)으로서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사람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뛰어다닐 수 있었다. 천신의 감응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밤이 깊어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했다.
며칠 후, 도성으로 돌아온 태자 거련은 부왕의 장례식을 준비했다. 광개토태왕이 승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은 경외심을 품고 태왕을 신으로 받들었다. 태왕의 위세에 눌려 있던 주변 나라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웅의 퇴장을 안타까워했다.
영천신제를 마치고 돌아간 각국의 군주가 보낸 조문단과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성으로 이어졌다.
광개토태왕은 22년의 재위 기간 중 서북쪽으로는 요서를 공략하여 거란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멀리 산해관을 넘어 북평·탁군 등을 공격함으로써 연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했다.
북쪽으로는 명맥만 남은 부여를 섬멸해 몽골 아래 흥안령까지 영토를 넓히고, 동북쪽으로는 연해주를 지나 시베리아까지 진출해 숙신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서남쪽으로는 관미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백제를 제압하고 한수 이남까지 영토를 넓혔다. 동남쪽으로는 중원과 금성을 거쳐 가야까지 정벌하고 중원에 한예관부(韓濊官府)를 설치해 삼한을 통치했다.
광개토태왕은 동서 6천 리, 남북 7천 리에 이르는 미증유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태자 거련과 신하들은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위대한 태왕이란 뜻으로 그를 광개토지경평안호태왕(廣開土地境平安好太王)으로 추존했다.
거련은 선왕의 묘소를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묘는 궁궐의 모양을 본떠 7층의 단으로 만들었고 생전과 다름없이 살 수 있도록 세간과 생활 도구를 갖추어 뒀다.
또한 도화원의 화공들을 총동원해서 무덤의 벽에 광개토태왕이 평소 좋아했던 거문고를 비롯한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 연무하는 무사, 씨름을 즐기는 장사, 춤추는 여인, 전쟁에 나서는 군대의 행렬을 그려 넣었다. 더불어 천장에는 해신과 달신을 비롯해서 별자리와 사신을 새겨 넣었다. 묘 앞에는 천 년 이후라도 무덤이 유지될 수 있도록 수묘인(守墓人)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적은 거대한 비(碑)를 세웠다. 거련은 이 비석에 광개토태왕의 중요 업적을 새겼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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