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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413년, 광개토태왕이 타계하자 태자 거련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고구려 제20대 임금인 장수왕(長壽王)이다.
장수왕은 등극하자마자 고타하를 대대로에 임명했다. 이에 명림자부를 비롯한 귀족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대대로는 고구려 제일의 관등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직위였다. 귀족 회의인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추대하면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간혹 외부의 덕망 있는 인물을 맞아들여 국정을 맡기더라도 대대로의 직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장수왕이 이런 관례를 무시하고 변방의 평민 출신인 고타하에게 대대로를 제수한 것이었다. 귀족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들은 왕에게 나아가 불가함을 역설했지만 장수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스물도 넘지 않은 나이임에도 심계가 깊어서 선왕이 고타하를 곁에 두라고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고타하는 광개토태왕을 보좌해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말단에서 시작해 대장군 자리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장수뿐만 아니라 군사들과의 유대 관계가 끈끈했다. 특히 고구려군의 핵심 전력인 철기군은 그가 발전시킨 군대였다.
이제 갓 왕위에 오른 장수왕이 선왕처럼 국정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군에 확실한 지지 기반을 둔 고타하의 힘이 꼭 필요했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이룬 광활한 대제국을 유지하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방대한 영토를 지키고 서토의 강국들을 아우르기 위해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야 했다. 그런 면에서 귀족들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서남북으로 광활한 땅을 개척하면서 귀족들 역시 상당한 노비와 식읍을 하사받았다. 그들의 힘이 세지면서 왕권을 위협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지지 세력을 규합해야 하는데, 당장 그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고타하뿐이었다.
장수왕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타하를 일약 대대로 자리에 앉혔다. 이는 그동안 태왕과 함께 국정의 한 축(軸)을 담당하던 귀족 세력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때부터 고구려의 귀족들은 장수왕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장수왕은 본격적인 체제 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선왕의 원정으로 영토가 크게 넓어졌지만 중앙과 새로 편입된 지역 간의 연계는 아직 원활하지 않았다.
장수왕은 직할 통치할 수 있는 곳에는 지방관인 욕살(褥薩)을 파견하고, 부족의 전통이 강한 지역에는 자치를 인정하는 대신 족장이나 제후의 자제를 도성으로 불러 태학에서 유학하게 했다. 가까이 두고 교류함으로써 그들과의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것이었다.
장수왕은 명령을 내리면 빠른 시일 안에 이를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관료 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도로와 수로를 정비하여 물산이 지역 곳곳으로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정책은 여러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고구려의 도성은 온 천하의 상인과 물산이 모여드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변모했고 주변국의 인재가 모여드는 정치의 중심이자 문화의 보고(寶庫)로 성장했다.
어둠을 틈타 바삐 움직이던 사내의 발걸음이 어느 대갓집 솟을대문 앞에서 멈췄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하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하인은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사내를 후원의 밀실로 데려갔다. 방 안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비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게. 우공.”
어둠을 털어 내고 있는 사내는 바로 우나굴의 손자인 우부상(于夫祥)이었다.
커다란 풍채에 어울리는 풍성한 수염을 늘어뜨린 명림자부는 우부상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명림자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모두 모인 듯하니 내가 그대들을 이곳으로 부른 연유를 말하겠소.”
우부상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오라는 명림자부의 전갈을 받고 짚이는 게 있었다. 사실 그가 늦은 이유도 이 자리에 참석할지를 고민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거련을 어리게만 보고 방심한 게 실수였소. 진작에 고타하를 몰아냈더라면 지금처럼 겁 없이 날뛰지는 못했을 거요. 그는 고구려의 정신을 망각하고 있소. 선왕의 유지(遺志)는 서토를 제패하고 만방에 고구려의 명성을 떨치는 거요. 그런데 거련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소. 그의 잘못을 일깨우려는 신하는 예외 없이 식읍을 빼앗기고 조정에서 내쳐지고 있소. 우리도 오래지 않아 팽 당하게 될 거요. 무슨 수를 써야만 하오.”
“국왕을 몰아내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우부상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리해야겠지.”
명림자부에게서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다른 귀족들 역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방 안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우부상은 이들의 음모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면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없을 듯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거사에 참여하겠다고 대답했다.
명림자부의 집을 빠져나온 우부상은 한숨을 돌렸다. 조금만 더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아마도 질식해 버렸을 것이었다. 정신이 좀 맑아지자 새삼 두려움이 밀려왔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당장 어둠 속에 숨고 싶었다.
파수를 도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만이 간간이 정적을 깼다. 밤이 깊었는지 사방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부상은 참기 어려운 적막감 속에서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조부 우나굴은 집안의 장손인 우부상을 특히 아껴서 지방에 부임할 때마다 항상 데리고 다니며 훈도(訓導)했다.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굴복시키고 패하 이서 지역에 7개 성을 새롭게 쌓을 때 우나굴은 수사(守使)로서 그 일을 감독했다. 우부상도 조부와 함께 한홀의 관사에서 지냈다.
소년의 티를 벗어 던지고 혈기 방자한 청년이 된 우부상은 거칠 것 없이 군내를 돌아다니며 말썽을 일으켰다. 사냥한답시고 함부로 경작지에서 말을 달리기도 하고, 가축을 상대로 활을 쏘아대기도 했다. 아첨하는 왈짜들과 어울려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거리를 활보하다가 지나가는 부녀자를 희롱하기도 했다. 수사의 망나니 손자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결국엔 조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우나굴은 손자를 조용히 불렀다. 우부상은 불벼락이 떨어지리라 예상했다. 이는 그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우부상은 도성에서 누리던 화려한 생활이 그리웠다. 도성에서는 또래의 공자들과 어울려 놀 것이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처럼 궁벽한 곳으로 데려와 매일 경당의 도를 지겹게 늘어놓는 할아버지야말로 그의 인생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조부가 꾸짖으면 참지 않고 대들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우부상은 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조부의 처소로 향했다. 잔뜩 화가 나 있을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조부의 얼굴은 고요하다 못해 평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서 앉거라. 내 그동안 공사(公事)가 바빠 너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 같구나.”
예상과 다른 다정한 태도에 우부상은 자칫 마음이 누그러질 뻔했다.
우부상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인 일로 소손(小孫)을 부르신 겁니까?”
“오늘 아침에 성곽 축조를 살피러 가는 길에 들판을 보니 탐스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꽃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더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맞더구나.”
조부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우부상은 참지 못하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저를 꾸짖으려 부르신 게 아닙니까? 차라리 내치십시오. 저도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우부상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내뱉었다.
“네가 그토록 가기를 원하는 곳이 도성이더냐?”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무슨 할 일이 있습니까. 그저 허송세월만 할 따름입니다.”
우나굴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손자를 바라봤다.
“너의 눈에는 백성이 보이지 않느냐? 나는 네가 그들을 보고 마음에 담기를 바랐다.”
“하찮은 무지렁이들을 상대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큰일을 하고 싶습니다.”
“네가 무지렁이라 말하는 자들이 곧 이 나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어찌 그리도 우활(迂闊)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 나라의 주인은 임금님이시고, 그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우리 귀족이 아닙니까. 저 무지한 것들이 나라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우부상은 만나는 사람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조부의 태도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사람은 모름지기 운명을 타고나는 법이었다. 자기 신분이 귀족인 것은 하늘이 내려준 특권이었다.
우나굴은 손자를 타일렀다.
“네가 믿고 있는 권력이란 저 들판의 꽃과 같고, 백성은 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흙과 같다. 대지는 몇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지만 저 꽃을 보아라. 채 열흘도 가지 못한다. 그러니 헛된 권력을 탐하지 말고 대지(大地)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라.”
“저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그저 가지지 못한 자가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늘어놓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도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명림(明臨)씨라고 그 영화가 영원하리라 생각하느냐? 권력은 탐욕을 부르고 끝내 자신을 망치는 법이다. 너는 이곳에 머물며 진정한 동량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부상에게 조부의 충고는 귓가를 스쳐 가는 산들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중하라는 할아버지의 간곡한 충고를 뿌리치고 도성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조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찾지 않았다.
우부상은 이십여 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 와서 조부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비롯한 귀족들이 공이 있건 없건 대를 이어 막강한 권력을 누리다 보니 내부에서 썩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부상이 다른 귀족들과 다른 점은 자신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거센 물결에 휘말렸기에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냇물 위로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그저 한없이 흘러가다가 바위에 쓸려 갈기갈기 찢길 운명이었다.
명림자부 일당의 거사는 불꽃을 피우기 전에 사그라질 운명이었다. 고타하는 요주의 인물 주변에 첩자를 심어 두었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시시각각 포착할 수 있었다.
고타하는 급히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했다. 국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번 일로 피바람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역심을 품기는 했지만 이들은 누대(累代)에 걸쳐 나라에 공이 있는 집안이고 중책을 맡은 신하였다. 이들을 모두 처단하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장수왕은 혼란이 아니라 안정을 원했다. 이번 일은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다.
장수왕은 오랜 고심 끝에 고타하를 불러 명을 내렸다. 왕명을 들은 고타하는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국왕의 심계는 혀를 내두를 만큼 범상치 않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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