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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명림자부 패거리는 그동안 은밀히 길러 온 사병을 이끌고 밤을 틈타 궁으로 쳐들어갔다. 궁문의 수문장 역시 한통속이어서 이들은 어렵지 않게 편전 앞에 당도했다. 편전 앞마당에는 횃불만 타오르고 있을 뿐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선두에 선 군사들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머뭇거렸다.
명림자부가 나서며 사기를 돋우었다.
“그처럼 대단한 척하던 근위병은 다 어디로 갔느냐! 우리의 그림자만 보고도 꽁무니를 뺐구나!”
반군들은 긴장을 풀고 함께 근위병을 비웃었다.
반란군이 편전 안으로 뛰어들려 할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대낮같이 밝아지면서 사방에서 활을 든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사이로 한 장수가 나서며 외쳤다.
“감히 역모를 꾀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로구나!”
불빛에 얼굴을 드러낸 장수는 도성의 방위를 맡은 대모달(大模達) 아불화상(阿佛和祥)이었다. 아불파연의 손자이자 장수왕의 심복 중 하나였다. 아불씨는 대대로 왕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충신열사의 집안이었다.
아불화상의 명에 따라 궁수들이 화살을 메긴 채 점점 포위를 좁혀 왔다. 도성 수비대가 미리 알고 매복해 있던 것이라면 고작 천여 명의 반군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명림자부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 듯 일그러졌다.
아불화상이 크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반란군들이 머뭇거리자 당황한 명림자부가 황급히 소리쳤다.
“저자의 말에 속지 마라! 역모를 꾀한 자를 어찌 살려 두겠느냐! 우리를 와해시키려는 수작이다!”
이때 옆에 있던 우부상이 명림자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제지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우리는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왕군에게 진 거요.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 대장부의 자세 아니겠소.”
우부상이 먼저 손에 들었던 칼을 내던졌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창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림자부 혼자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손힘이 풀렸는지 칼자루를 놓쳤다. 칼이 돌바닥에 떨어지면서 오싹한 금속음을 냈다.
반군들은 차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에 서 있던 귀족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불화상은 수하들에게 그들을 포박하게 했다. 귀족들은 차례로 포승에 묶여서 끌려 나갔다.
우부상이 금위 군사에게 이끌려 아불화상의 앞을 지날 때였다. 아불화상이 주위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가와 속삭였다.
“수고했네. 자네가 큰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동족 간에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 걸세.”
우부상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명림자부를 만나고 온 후 며칠을 고민한 우부상은 어릴 적 친구인 아불화상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살길을 물었다.
우부상은 이번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리라 여겼다. 그래서 자기 집안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조부들이 둘도 없는 지우(知友)였기에 우부상과 아불화상은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그들의 이름에 똑같이 상(祥) 자가 들어간 것도 안을지교(安乙之交·안류와 을파소의 우정)에 뒤질 것 없는 조부들의 우의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했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며 풍류(風流)를 즐겼던 우부상과 달리 아불화상은 학문과 무예에만 정진했다. 우부상은 아불화상을 답답한 사람이라고 타박했고, 아불화상은 우부상을 천박하다고 여겼다. 의기투합했던 조부들과는 달리 이들은 화합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릴 때 쌓은 서로에 대한 의리만은 아무리 사이가 벌어졌다고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부상의 할아버지인 우나굴이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차츰 둘 사이가 소원해졌다.
아불화상은 일단 고타하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이를 전해 들은 장수왕이 반군을 함정에 빠뜨릴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장수왕은 아불화상에게 군사를 이끌고 궁성 깊숙이 매복한 채 반군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걸 기다리게 했다. 우부상의 역할은 궁 안으로 들어선 반군을 수비군이 매복하고 있는 편전 앞으로 이끌고 이들이 포위된 상태에서 저항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반란은 쉽게 제압됐다. 장수왕이 궁 밖으로 얘기가 새어 나가는 걸 철저히 막았기에 백성은 모반이 일어난지도 몰랐다.
장수왕은 명림자부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 후 변방에 위리안치(圍籬安置)했다. 다른 귀족들 역시 관복을 벗어야 했다. 외부에서 볼 때는 장수왕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장악해 가는 절차로 여겨졌다.
고구려 왕의 깃발이 성벽에 꽂힌 채 바람에 나부꼈다.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나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했다.
순시에서 돌아온 장수왕이 어전회의에서 천도(遷都)를 발표했다. 좌우에 시립해 있던 대신들은 충격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명림자부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귀족들의 기세가 꺾이고 왕권이 대폭 강화되긴 했지만 이처럼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태대형(太大兄) 연부개(淵夫介)가 정신을 가다듬은 후 아뢰었다.
“국내성은 수백 년 동안 도성의 역할을 해 온 신성한 곳입니다. 어찌 그리 쉽게 천도할 수 있습니까.”
대대로 고타하가 나섰다.
“이번 천도로 국내성이 버려지는 것은 아니오. 이곳은 언제나 우리의 성지로 남게 될 것이고,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 온 정신은 우리 후손에게 계승될 것이오. 다만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천도하려는 거요. 도성이라 하면 모름지기 자급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정치와 교역의 중심지로서 사방으로의 교통이 원활해야 하오. 그런데 환도성은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으로부터 지키기에는 유리하나, 바다와 멀어 제해권을 장악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소. 고구려는 앞으로 주변국을 모두 제압하고 천하 만방에 그 이름을 떨쳐 나갈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곳으로 도성을 옮겨야 하오.”
“이곳에는 선대왕이 능이 있습니다. 게다가 조상의 묘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를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능 관리는 수묘인에게 맡기면 되오. 그리고 국내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종종 들를 수 있소.”
천도를 놓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편전 안은 격렬한 언쟁으로 소란스러웠다.
한참 이를 지켜보던 장수왕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들 하시오!”
국왕의 제지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짐이 결정한 일이니 더는 왈가왈부 마시오. 다시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엄히 다스리겠소.”
장수왕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편전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한참이 지난 후 정적을 깨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를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대주부(大主簿) 을사해(乙嗣該)였다.
“평양으로 정했소. 그곳은 산세가 좋고 풍광이 일품이오. 넓은 평지를 끼고 있고, 패수(浿水)가 흘러 해상과 육상을 통한 교역이나 수송에 이점이 있소. 더불어 주변에 넓은 경작지가 있어 그곳에서 산출되는 곡식만으로도 도성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여러 면에서 도읍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오.”
국왕의 의지가 확고하고 천도의 당위성이 분명했기에 귀족들은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없었다.
장수왕은 천도를 결심한 이유로 도성의 입지 조건을 내세웠지만 그 내심을 살펴보면 귀족들을 경계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명림자부의 난 이후로 귀족들이 몸을 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약간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언제든 이빨을 드러낼 것이었다.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국내성에 터를 잡고 있는 귀족의 세력 기반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평양성으로의 천도는 그들의 근거지인 국내성을 떠남으로써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천도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대성산 일대에 궁성터를 닦고 대성산성(大城山城)과 안학궁(安鶴宮)을 짓는 역사를 일으켰다. 그 주위에 청호동산성·청암토성·고방산성 등을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 도성을 수호토록 했다.
서력 427년, 몇 해에 걸친 공사가 마무리됐다. 장수왕은 왕실 식구들과 대소 신료, 수많은 백성을 데리고 평양성으로 향했다. 국내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에 아불화상을 성주로 삼아 지키게 했다.
이리하여 국내성 시대는 막을 내리고, 웅지(雄志)를 펼치는 평양성 시대가 도래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성을 옮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국들은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한편 경계를 강화했다. 특히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천도의 목적이 남진(南進)을 위한 포석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눌지왕이 등극하면서 고구려와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였기에 더욱 불안했다.
지난날 왜적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광개토태왕은 실성이 왕위를 잇도록 내물왕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하슬라를 방문했던 태왕은 실성을 남겨 놓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내물왕은 그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지만 태왕이 무서워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고구려의 막강한 힘을 확인한 신라의 귀족들은 하루가 다르게 실성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광개토태왕의 후광을 입은 실성은 신라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력을 규합했다.
이듬해, 연로한 내물왕이 임종을 맞게 되자 보반 부인은 매우 걱정스러웠다. 큰 왕자인 눌지(訥祇)가 겨우 다섯 살이고 그 아래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은 더 어린 나이였기에 실성을 대적하기 어려웠다.
왕후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실성은 왕자가 너무 어리다는 명분을 내세운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 광개토태왕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면서 반대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그는 내물왕의 자식들이 장차 화근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싹을 자르기 위해 이들을 멀리 보내기로 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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