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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시 쳐들어올지도 몰라 불안한 상태였다. 한예관부가 있기는 했지만 광개토태왕의 군대가 물러간 마당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성왕은 왜군의 침입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왜국과의 화친을 모색했다. 그는 왜에 사신을 보내 양국의 친선을 도모했다. 왜왕은 흔쾌히 동의했다. 두 나라가 강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실성왕은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왜왕의 신뢰를 얻으면서 골칫거리까지 치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신라와 왜국 간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왜의 인덕왕은 고구려군이 서방 정벌에 나선 틈을 타서 신라를 쳤다. 하지만 왜군은 명활성(明活城)에서 참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그 후로도 그들은 대마도에 병영을 두고 신라의 변경을 간헐적으로 침노했다.
분노한 실성왕이 정예군을 보내 대마도를 토벌하려 하자 서불한(舒弗邯) 미사품(未斯品)이 말렸다.
“무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 합니다. 더구나 바다를 건너 적을 공격하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만일 실패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될 겁니다. 차라리 험난한 지형에 요새를 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승산이 높습니다. 내가 남을 끌어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다니지는 말아야 한다는 옛 성현의 말을 유념하십시오.”
이 말을 그럴듯하게 여긴 실성왕은 대마도 정벌을 포기하고 해안 곳곳에 요새를 세워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백제와 가야는 호시탐탐 신라를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에 실성왕이 믿을 구석이라는 고구려밖에 없었다. 이때 광개토태왕이 붕어하고 장수왕이 즉위하니 실성왕은 복호를 보내 충성을 다짐하고 결속을 확인했다.
광개토태왕이 승천하자 남방의 나라들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간간이 신라와 왜의 국지전이 벌어질 뿐이었다.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는 단아한 용모에 군자의 풍모를 갖춘 청년으로 성장했다. 실성왕은 늠름한 눌지를 보며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호위무사인 당개(幢介)를 불렀다.
당개는 고구려 사람으로 호랑이상에 곰 같이 억센 팔과 통나무처럼 굳센 다리를 가진 사내였다. 실성왕은 고구려에서 볼모 생활을 할 때 그를 만났다.
실성이 볼모 생활의 무료함을 참지 못해 국내성 저자를 구경하러 나선 날이었다. 신라에서 볼 수 없는 고구려의 풍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종자를 앞세우고 저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갑자기 한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싸움이 났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실성도 호기심이 일어 사람들을 따라 달려갔다.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한 사내가 여러 장정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내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카로웠다. 그를 둘러싼 자들은 기세에 눌려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사내가 먼저 몸을 날려 가까이 서 있던 자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몸집은 태백산의 바위처럼 우람한데 몸놀림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그는 순식간에 예닐곱의 사내를 쓰러뜨렸다.
실성은 사내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옆에 선 장사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장사치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니, 당개를 모른단 말이오?”
“이곳이 초행이라오.”
“저 사람의 이름은 당개이고, 이 저자에서 손꼽는 역사요. 도성을 통틀어도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을 거요.”
당개에게 반한 실성은 종자를 시켜 그의 거처를 알아보게 했다.
얼마 뒤 종자가 돌아와서 아룄다.
“당개는 저자 끝 종루 옆에 있는 움막에서 산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가족도 없이 혼자 지낸다고 합니다.”
종자가 전한 말에 따르면 당개는 저자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했다. 넉넉지 않은 처지이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약한 자를 발 벗고 나서서 돕는 의인이었다.
며칠 후 실성은 예물과 함께 술과 고기를 챙겨서 당개의 움막으로 찾아갔다.
“귀하신 분 같은데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찾아오셨소?”
당개의 물음에 실성이 공손히 대답했다.
“어제 저자에서 장사의 모습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이 샘솟아 이리 찾았소. 무례를 용서하구려.”
당개가 박장대소를 했다.
“흠모라니요? 나는 그저 하찮은 일꾼에 지나지 않소.”
“그대가 어떤 신분이든 그건 상관없소. 그대를 이리 만날 수 있어 기쁠 뿐이오.”
실성은 당개에게 약간의 금은 패물을 선물로 내놓았다. 당개는 패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종자의 손에 들린 술과 안주가 들어 있는 꾸러미를 유심히 쳐다봤다.
“손에 있는 것이 술 아니오? 그거나 내주시구려.”
당개는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내였다. 실성은 종자에게 술과 안주를 풀어놓게 했다.
실성과 당개는 의기투합하여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흉금을 털어놓았다.
날이 밝자 당개가 실성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일에 얽매이기 싫어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왔소. 하지만 공과 같이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소이다. 언제든 필요하면 나를 찾으시오. 어디든 한달음에 달려가겠소.”
이후로도 실성은 종종 당개를 찾아 술잔을 기울이며 우의를 다졌다.
세월이 흘러 실성은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당개를 금성으로 데려와 별궁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실성왕이 당개를 조용히 불렀다.
“왕자 눌지로 인해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네. 그를 없애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가 목숨을 잃게 될 거야. 자네가 힘을 좀 써 주게나.”
당개는 실성의 변한 모습에 적이 실망했다. 지난날의 패기는 사라지고,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조바심을 치는 소인배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당개는 실성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며칠 후 당개는 복면을 하고 야음을 틈타 눌지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밤이 늦었건만 눌지 왕자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당개는 칼을 빼 들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눌지는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한 치의 두려움이나 망설임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매일 만나는 벗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당개는 칼을 쥐었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듯했다. 당개의 눈에 비친 눌지는 단아한 용모에 유연한 기상을 갖춘 군자(君子)였다.
당개는 자신이 눌지를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를 해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구려. 앞으로 몸조심해야 할 거요.”
당개는 몸을 돌려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눌지의 집을 떠난 후 바로 금성을 빠져나와 고구려로 발길을 돌렸다.
서력 417년, 눌지는 비밀리에 양성한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갔다. 실성왕은 궁을 빠져나가려다가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서력 405년, 아신왕은 고구려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나서 화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 무렵 태자 전지(腆支)는 고문관(顧問官)으로 왜에 머물고 있었다. 국사는 한시도 멈출 수 없었기에 신하들은 왕제인 훈해(訓解)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는 태자가 돌아올 때까지 정사를 살펴야 했다.
훈해는 학문에 조예가 깊고 인덕을 갖춰서 백성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지만 신하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어쩔 수 없이 섭정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아신왕의 막냇동생인 설례(碟禮)였다. 그는 진작부터 왕위에 욕심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태자가 왜에 머물고 있는 사이에 아신왕이 죽자 기회는 이때라 생각하고 병관좌평 진무와 공모하여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형 훈해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자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형제애와 권력욕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따랐다.
설례는 진무의 군사를 동원해서 궁을 점령하고 훈해를 살해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좌를 차지한 그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선포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살 것이요, 거역하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하리라!”
설례의 칼이 서늘한 빛을 내뿜자 신하들은 벌벌 떨었다.
왜에 머물고 있다가 아신왕의 부음을 들은 태자 전지는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전지는 인덕왕을 찾아가 향후의 일을 의논했다. 그는 자신의 호위병 1백과 인덕왕이 제공한 1백 명의 근위병을 이끌고 백제로 향했다.
태자 일행이 해남(海南) 포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한 사내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태자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소인은 해씨 집안의 해충(解忠)이라 합니다. 태자께서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전지가 의아하여 물었다.
“무슨 일이오?”
“왕제 설례가 섭정 훈해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그자는 모든 포구의 군사들에게 태자가 당도하면 잡아서 도성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 계시다가 군사들에게 발각되면 어떤 화를 당할지 모릅니다.”
태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식 된 몸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불효이거늘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도 살겠다고 몸을 피한다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내 잡혀서 죽는 한이 있어도 도성으로 가겠다.”
해충이 목소리를 높였다.
“태자께서 한성으로 가신다면 반드시 설례의 손에 죽게 될 겁니다! 목숨을 함부로 하는 것이 돌아가신 폐하께서 바라시는 일이겠습니까!”
태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무례하게 언성을 높여서 죄송합니다. 죗값은 전하께서 무사히 왕위에 오르신 후에 치르겠습니다. 우선 배를 돌려 해남 앞바다에 있는 완도로 피하십시오. 저는 도성으로 돌아가 거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믿을 사람은 그대뿐인 것 같구려. 부디 조심하시오.”
태자는 해충의 말에 따라 호위군을 이끌고 완도로 피신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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