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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충은 해씨의 가주인 해원(解元)의 장자였다. 어릴 때 박사 왕인 밑에서 수학했는데, 그 총명함과 기상이 학생 중 으뜸이었다.
예전에 그의 스승인 왕인이 왕명을 받아 일본으로 떠날 때 근구수왕이 물었다.
“박사의 제자 중에 나라를 이끌만한 인재가 있다면 천거해 주시오.”
“해원의 아들 해충이 믿을 만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인재입니다. 옆에 두고 쓰십시오.”
근구수왕은 그 말에 따라 해충을 중용하려 했다. 하지만 해씨(解氏)가 조정에 출사하는 것을 원치 않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해씨는 근초고왕 때의 반란 사건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척당하는 처지였다.
해충은 학문에만 전념해서 나라에 동량이 되는 제자를 많이 양성함으로써 백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도성으로 돌아온 해충은 서제 여신(餘信)·종제 해구(解丘)·해수(解須) 등과 함께 밤을 틈타 그동안 은밀히 규합한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궁을 지키던 장병은 잔인한 설례를 미워했기에 궁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간신들과 함께 술에 잔뜩 취해 있던 설례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해구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궁을 장악한 해충은 백성에게 무도한 왕의 죽음을 알리고 해수를 완도로 보내 태자를 모셔오게 했다. 도성의 백성도 설례를 증오하고 있었기에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기쁨을 나눴다.
며칠 후, 완도에서 온 태자 전지가 옥좌에 오르니 이가 바로 백제 제18대 임금인 전지왕(腆支王)이다.
전지왕은 해충의 공을 치하하며 높은 벼슬을 내리려 했다.
해충은 극구 사양했다.
“신은 단지 신하 된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어찌 과분한 상을 받겠습니까. 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치겠습니다.”
아무리 간곡히 청해도 해충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진지왕은 학당의 현판을 손수 써서 내리고 1천 석의 곡식을 하사했다. 해충은 국왕의 성의를 끝까지 거절할 수 없어 이것은 받아들였다.
이듬해 봄 전지왕은 공을 세운 여신을 내신좌평, 해수를 내법좌평,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했다. 그리고 해충의 딸인 팔수(八須)를 왕후로 맞이해 은공에 보답했다.
해가 바뀌었다. 전지왕은 여신을 상좌평(上佐平)으로 삼아 정사를 관장하게 했다. 이때에야 비로소 백제에 상좌평이란 관직이 생겼다. 이는 고구려의 국상과 비슷한 직책이었다.
전지왕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돈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을 살폈다. 또한 동진·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사구성(沙口城)을 쌓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로써 백제는 차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전지왕 이후로 진씨에 눌려 있던 해씨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며 전면에 나섰다. 이제 진씨의 시대가 저물고 해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력 417년, 눌지가 신라 제19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눌지왕은 동생들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간 실성왕의 농간으로 복호는 고구려, 미사흔은 왜의 대화국에 볼모로 가 있었다.
눌지왕이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짐은 아우들 생각에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소. 그들을 데려올 묘책이 없겠소?”
파진찬 후엽(候曄)이 나섰다.
“변설이 능한 자를 보내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가 적당하겠는가?”
“제가 듣기로 수주촌주(水酒村主)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주(一利村主) 구리내(仇里迺), 이이촌주(利伊村主) 파로(波老) 세 사람이 입담이 좋고 꾀가 많다 합니다.”
눌지왕은 사람을 보내 이들을 데려오게 했다.
세 사람이 대전에 들어서자 국왕은 반갑게 맞이했다.
“짐의 두 아우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간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으로서 아우들 걱정에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그들을 데려오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간곡한 물음에 수주촌주 벌모발이 아뢰었다.
“저희보다 적임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삽량주(歃良州)의 간(干)으로 있는 박제상(朴堤上)이란 자입니다. 담이 크고 지혜가 뛰어나므로 폐하의 근심을 능히 풀어 드릴 겁니다.”
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예로 파사왕의 5대손이었다. 파진찬 물품(勿品)의 아들로 삽량주의 장관으로 나가 있었다.
눌지왕은 사람을 보내 제상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그가 대전으로 들자 눌지왕은 간곡한 어조로 물었다.
“나를 위해서 먼 길을 떠날 수 있겠는가?”
이번 임무는 모두가 떠맡기를 꺼리는 일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속내를 알 수 없었고, 왜의 대화국과는 감정이 안 좋은 상태였다. 자칫하면 왕자들을 구하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제상은 서슴지 않았다.
“신하로서 왕명을 따르는 건 당연한 도리입니다. 비록 소신이 불초하오나 반드시 이번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이리하여 제상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게 됐다.
실성을 죽이고 멋대로 왕위에 오른 눌지를 벼르고 있던 장수왕은 신라에서 사신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 얼굴이 굳었다.
장수왕은 박제상을 보자 크게 꾸짖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역모를 일으켰느냐?”
제상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실성은 주색잡기에 눈이 멀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상국에서 내린 사명 또한 뒷전이었습니다. 이러하니 나라 안팎에서 원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한예관부가 유명무실해진 것도 그가 관부의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태왕 폐하의 신하로서 직분을 다하지 않고 백성에게 누를 끼쳤으니 당연히 물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비해 눌지왕은 관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상국의 위명을 사방에 떨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장수왕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신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치에 맞았다.
제상은 고구려 왕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태왕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라.”
“저희 신라가 왜국을 비롯한 타국의 침범을 자주 받는 이유는 군대가 강하지 못해서입니다. 폐하께서 배와 강궁을 만드는 장인을 보내 주신다면 외적을 막는 번병(藩屛)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장수왕은 새삼스럽게 제상을 쳐다봤다. 자신의 앞에서 주눅이 들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자기 나라를 위해 잇속을 챙기려는 태도도 신하들의 귀감이 될 만했다.
고구려 왕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본 제상은 속으로 기뻐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사신행의 목적은 상국의 폐하께 신라의 왕이 바뀐 사실을 고하고 윤허를 받기 위함입니다. 더하여 이곳에 있는 복호 왕자를 고국으로 보내 주십사 청을 드리려 합니다.”
장수왕은 짐짓 노기를 띠며 내뱉었다.
“너희가 짐에게 왕자를 보낸 이유를 잊었느냐? 양국 간의 화의를 파기하자는 뜻이냐?”
박제상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소신이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데 필요한 도(道)는 지극한 믿음뿐이라 했습니다. 서로 의심하며 볼모를 보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처사입니다. 우리 임금이 사랑하는 아우를 만나지 못한 지 벌써 십여 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애달픈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부디 은혜를 베풀어 복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제상이 인정에 호소했기에 장수왕도 모질게 거부할 수 없었다.
장수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의 말이 옳구나. 군자는 의(義)로써 벗을 사귄다 했는데 하물며 임금인 내가 어찌 이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 혈육의 정은 천륜(天倫)에 속한 것이다. 짐이 복호를 보내 신라 왕의 애달픔을 위로하겠노라.”
장수왕은 더불어 눌지왕의 등극을 인정하고, 앞으로 양국 간의 우호 관계가 변함없다고 천명했다. 축하 선물로 조선장(操船匠)과 각궁장(角弓匠)을 신라에 보내 주기로 했다.
그날 밤, 장수왕은 원로에 고생한 사신단을 위로하기 위해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얼마 후 제상은 복호와 함께 금성으로 돌아왔다. 이들을 따라온 고구려의 조선장과 각궁장 덕분에 훗날 신라가 번창해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나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니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눌지왕은 동생을 보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복호는 십 년의 세월 동안 장성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시간도 형제의 정을 묽게 하지는 못했다. 국왕은 동생을 얼싸안았다.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복호 또한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형을 만난 탓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눌지왕은 제상을 크게 치하했다.
“짐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네 공을 절대 잊지 않으마.”
말을 잇던 국왕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짐이 두 아우를 좌우의 팔처럼 여겨 왔건만 한쪽 팔을 얻고 나니 다른 팔이 절로 생각나는구나.”
눌지왕은 둘째 복호를 보니 막내 미사흔 생각이 더 간절했다.
제상은 국왕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임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당장 왜로 떠나겠습니다.”
제상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겁니다. 고구려는 우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고, 고구려의 태왕 역시 어진 임금이기에 소신의 억지가 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는 다릅니다. 그들과는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구설(口舌)로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꾀를 써서 저들을 속여야 합니다.”
눌지왕이 궁금하여 물었다.
“어떤 계책을 쓰려 하는가?”
“소신이 바다를 건너면 저의 처자를 옥에 가두시고, 제가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왜로 달아났다는 소문을 퍼뜨리십시오. 그러면 왜 왕은 저를 믿고 수하에 거둘 겁니다. 그에게 충성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미사흔 왕자를 탈출시키겠습니다.”
눌지왕은 살신성인하는 제상의 충절에 감복했다.
“어찌 너의 처자를 음습한 옥에 가둘 수 있단 말이냐?”
“그러지 않으면 저들이 믿지 않을 겁니다.”
제상은 뒷일을 부탁하고 궁을 떠났다. 그러고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출항지인 율포(栗浦)로 향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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