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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상의 처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으로 하인을 보냈다. 하인이 돌아와서는 제상이 다시 왜로 떠났다고 알렸다.
제상의 처는 남편이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급히 채비를 차리고 율포로 달려갔다.
제상의 처가 율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왜로 가는 배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달려갔다.
아내를 본 제상은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아 냈다.
“부인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시오?”
“당신이 왜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배웅하러 나왔습니다.”
제상의 처는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남편에게 해가 미칠 것 같았다.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녀는 의연하게 배웅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다녀오리다.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구려.”
제상의 처는 남편을 못 가게 말리고 싶었지만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말린다고 들을 남편도 아니었다.
제상을 태운 배가 점점 멀어져 가더니 어느새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제상의 처는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대화국의 도성인 대화성에 도착한 제상은 곧장 인덕왕 앞에 나아갔다.
“신라의 눌지는 무도하게 실성왕을 시해하고 왕좌를 탈취했습니다. 어찌 신하 된 도리로 이를 묵과할 수 있겠습니까. 눌지를 몰아내고 태자를 왕위에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폐하의 성덕(聖德)을 듣고 몸을 의탁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제상은 절박한 눈빛이었다.
인덕왕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신라의 간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신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화국 왕의 떠보는 질문에 제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눌지가 실성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고구려 태왕이 대로했습니다. 간교한 눌지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 계승을 인정받았습니다. 고구려 태왕은 지난날 대화국이 반기를 든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신라와 함께 이 나라를 칠 거라 합니다.”
이때 대화국에서는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해서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제상이 정곡을 찔렀지만 인덕왕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두고 보면 알 수 있겠지.”
인덕왕은 제상을 객사에 머물게 하고 군사를 시켜 감시했다.
제상이 관사에 갇혀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대화국에서 신라에 심어 놓은 간자로부터 첩보가 도착했다.
“금성에는 제상이 모반을 꾀하다가 달아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옥에 갇혀 있답니다. 우리 쪽 인원이 옥사쟁이를 매수하여 확인한 일이니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곧 왜를 칠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인덕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다.
“내 확인해 보니 그대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소. 고구려와 신라가 우리나라를 치려 한다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제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공격보다 좋은 방어는 없습니다. 소신이 신라의 내부 사정을 잘 아니 길잡이를 맡겠습니다. 먼저 신라를 쳐서 기선을 제압한다면 고구려도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그대가 애를 써 준다니 무엇을 더 바라겠소. 짐은 무조건 따르겠소.”
“저에게 계책이 한 가지 있습니다. 듣기로 이곳에 신라 왕자 미사흔이 볼모로 와 있다고 하더이다. 그는 눌지왕이 아끼는 아우입니다. 이번 원정에 데려가 방패막이로 삼는다면 신라군도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할 겁니다.”
대화국 왕이 듣기에는 절묘한 계략이었다.
인덕왕은 제상의 말에 따라 신라로 출정할 준비를 했다. 제상을 향도로 삼고, 아지사주(阿知使主)·어우별(御友別) 등의 장수와 함께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로 나아갔다.
대화국왕은 대마도에 머물며 척후대를 보내 신라군을 염탐했다.
제상이 인덕왕의 거처로 찾아와 아뢰었다.
“미사흔이 딴마음을 품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신이 함께 기거하며 그의 속내를 살피겠습니다.”
인덕왕은 별 의심 없이 허락했다. 이때부터 제상은 미사흔과 함께 거하게 됐다.
미사흔은 제상이 신라를 배신한 인물인 줄로만 알고 경계했다.
밤이 되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제상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미사흔에게 말했다.
“소신은 국왕 폐하의 밀명을 받고 왕자를 탈출시키기 위해 거짓 항복을 한 겁니다.”
제상은 지난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얘기를 끝까지 들은 미사흔은 눈물을 흘리며 상대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줄 알았소. 그런데 그대가 이처럼 나를 위해 와 주니 고래 뱃속까지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구려.”
제상과 미사흔은 머리를 맞대고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몰아쳐 대화국의 배 수십 척이 파손되었다. 인덕왕은 배를 수선하고 전력을 정비토록 했다. 그러면서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미사흔은 제상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인품과 우국충정에 반했다. 그라면 반드시 자신을 고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제상이 생각하기에 미사흔을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대화국 왕의 경계심을 풀어야 했다. 그는 매일같이 미사흔과 어울려 연안에 배를 띄우고 오리와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의 모습은 아무 근심도 없는 듯 한가롭고 즐거워 보였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병들에 의해 인덕왕에게 보고됐다. 인덕왕은 미사흔이 더는 달아날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덕왕은 제상을 불러 미사흔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 신라 왕자는 어찌 지내고 있소?”
“소신의 설득이 주효한 듯합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체념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며 보내고 있습니다.”
인덕왕은 제상의 말을 믿고 미사흔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왕자의 처소에는 단지 두 명의 군사가 상주하며 시중을 들게 됐다.
며칠 후 깊은 밤에 제상이 미사흔의 침소로 찾아왔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경계가 느슨해졌으니 오늘 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천문을 보니 내일 새벽에는 안개가 짙게 낄 겁니다. 해안의 모래톱으로 가면 백제의 상인이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배로 이 섬을 빠져나가십시오.”
제상은 이미 많은 재물로 대마도를 왕래하며 교역하는 백제 상인을 매수한 상태였다.
“장군은 같이 안 가십니까?”
제상은 왕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준비를 재촉했다.
미사흔은 싸고 있던 여장을 던지며 말했다.
“내 장군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혼자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함께 가지 않으면 나도 여기 남겠소.”
제상은 안색을 바꾸며 단호하게 말했다.
“왕자께서 빠져나가는 동안 시간을 끌 사람이 필요합니다. 만일 함께 사라지면 금세 들통이 날 테고 그리되면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미사흔은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았다.
제상이 왕자를 달랬다.
“금성에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형님을 생각하십시오. 왕자를 무사히 탈출시키는 것이 신의 임무입니다. 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미사흔은 제상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은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비록 이렇게 떠나지만 장군의 은공은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겠소.”
제상이 왕자의 등을 토닥였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대화국 왕이 저를 아끼니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졌다. 미사흔의 처소를 지키는 군사들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제상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본 후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미사흔에게 손짓했다. 왕자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제상에게 다가왔다.
제상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 길로 곧장 해변으로 달려가십시오. 부디 무사히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미사흔이 울먹였다.
“부디 몸을 보중하시오.”
미사흔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힘겹게 옮기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제상은 왕자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사흔이 고개를 넘어 해변에 다다르자 파도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치 제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것만 같아서 뒤를 돌아봤다.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사흔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덕분에 해변의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왕자가 제상이 가르쳐 준 모래톱을 찾아가니 건장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주변을 살피며 재촉했다.
“빨리 가시죠. 왜군에게 들키는 날에는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사내가 이끄는 대로 바위 무더기를 돌아서 해변으로 나아가니 바다에 한선(韓船) 한 척이 떠 있었다. 한선은 배 밑바닥이 낮고 평평한 평저선으로 두 개의 돛을 달 수 있는 작은 배였다.
미사흔이 몸을 싣자 배는 서서히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검은 육지를 바라보며 미사흔은 만감이 교차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쁘지만 제상을 혼자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날 날이 밝았을 때는 사방에 온통 안개가 자욱해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제상은 일부러 느지막한 시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상이 밖으로 나오자 미사흔의 처소를 지키는 군사가 물었다.
“어찌 이리 늦게 일어나셨습니까?”
제상이 미소를 지었다.
“어제 배를 오래 탔더니 몸이 노곤해 그런가 보다.”
군사가 미사흔의 처소를 보며 물었다.
“왕자께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피곤하실 테니 깨우지 마라.”
군사가 의심치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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