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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이때 대문이 열리면서 부장 도가사주(都加使主)가 들어왔다. 그는 장군 아지사주의 아들로 만사에 철두철미한 장수였다.
“폐하께서 그대와 미사흔을 불러오라 하셨소.”
도가사주는 제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가 보기에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상은 태연하게 말했다.
“왕자께서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소.”
도가사주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왕명이 지엄한데 어찌 한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소!”
왜장은 제상이 말릴 틈도 없이 침소의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 미사흔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도가사주는 감시병을 다그쳤다. 그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장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장에게 소리쳤다.
“지금 즉시 군사를 풀어라. 섬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미사흔을 찾아야 한다.”
도가사주는 제상을 노려봤다.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시선이 제상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왕자를 어디로 빼돌린 건가?”
그는 제상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확신했다.
제상은 태연하게 왜장의 시선을 받았다. 지금쯤 미사흔은 왜군의 손이 미치치 않는 곳까지 달아났으리라. 이제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헛수고 마라. 왕자는 이미 이 섬을 벗어났다.”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도가사주는 제상을 포박하여 인덕왕 앞으로 끌고 갔다. 보고를 받은 대화국 왕은 그제야 제상의 농간에 놀아났음을 깨달았다.
인덕왕은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짐을 속이고도 살아남기를 바랐느냐?”
제상이 의연하게 대답했다.
“신하 된 자로 임금의 근심을 더는 일에 어찌 목숨을 아끼겠소.”
인덕왕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제상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충신을 신하로 둔다면 두려울 게 없을 듯했다.
인덕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대가 비록 죽을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 기백과 충심을 높이 산다. 짐을 섬기도록 하라. 평생의 부귀영화를 보장하겠다.”
제상은 모욕을 당한 듯 불쾌한 얼굴로 외쳤다.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단 말이냐.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다. 어서 죽여라!”
인덕왕은 제상의 기백에 압도됐다.
“저런 충신이 있으니 신라는 함부로 넘볼 수 없겠구나.”
대화국 왕은 제상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목도(木島)로 귀양을 보냈다.
도가사주가 국왕에게 간했다.
“제상은 천하의 기재(奇才)입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언젠가는 큰 해가 될 자입니다. 그를 살려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인덕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제상은 목숨을 위협한다 해서 뜻을 굽힐 인물이 아니었다. 아깝기는 하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죽여야 했다.
대화국 왕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도가사주에게 제상을 죽이라 명했다.
도가사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상이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화국의 신하가 됐다면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됐을 것이었다.
도가사주는 급히 목도로 향했다. 왕의 마음이 다시 바뀔지도 몰랐기에 서둘러야 했다.
목도에 도착한 도가사주는 제상을 끌어내 왕명을 거행했다. 국왕을 속이고 나라를 위태롭게 한 죄를 적용해 극형인 화형(火刑)에 처했다.
마당에 장작이 쌓였다. 군사들이 포박된 제상을 끌어다가 장작 위에 앉혔다. 제상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 죽음 앞에서도 담담했다.
군사가 횃불을 들어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 순간 도가사주는 제상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신념을 이룬 자의 만족감과 삶을 초월한 현자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왜장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가사주는 마음을 다잡고 큰 소리로 형을 집행하라 명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더니 곧 제상의 몸도 불길에 휩싸였다. 열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불길은 제상을 완전히 삼킨 후에도 계속해서 하늘로 뻗어 올랐다. 마치 꿈틀거리는 한 마리 용처럼 보였다. 용으로 변한 제상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대마도를 빠져나온 미사흔은 율포를 거쳐 금성에 무사히 도착했다.
눌지왕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제야 우리 형제가 모두 함께하는구나!”
“제상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미사흔은 제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형제를 만난 기쁨으로 홍조를 띠었던 국왕의 얼굴도 일순간 어두워졌다.
“제상은 우리 형제가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베풀었다. 그가 무사하기만 빌 뿐이다.”
얼마 후 제상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신라에 전해졌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던 제상의 가족과 신라 왕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눌지왕은 제상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게 했다. 장례식은 수많은 백성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시신 없는 장례식이었지만 제상의 충심은 참석한 백성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애도의 눈물이 산하를 적셨다.
눌지왕은 제상의 공을 기려 대아찬(大阿飡)에 추증하고 가족이 평생 먹고살 수 있도록 많은 재물을 내렸다. 미사흔은 은공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그의 둘째 딸과 혼인하고 평생 처가 식구를 보살폈다.
제상의 처는 남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장례까지 치렀지만 당장에라도 남편이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제상이 왜로 떠난 후 그녀는 매일같이 율포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수릿재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무수히 많은 배가 들어왔지만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자식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율포 인근에 사는 주민은 수릿재를 지날 때마다 초췌한 몰골의 그녀를 보고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재상의 처는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가족들은 백방으로 그녀를 찾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가족들이 지쳐갈 무렵 율포에서 올라온 상인이 제상의 집에 찾아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릿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여자를 보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말하길 제상의 아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제상의 두 아들이 급히 수릿재를 향해 말을 달렸다. 수릿재에 도착한 그들이 아무리 둘러봐도 어머니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있었다는 자리에는 시커먼 바위가 우뚝 서 있었다. 큰아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느 날 그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바위가 솟아 있었다고 했다.
두 아들이 주변을 수소문했지만 모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 성과 없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월히 흐른 후 사람들은 제상의 처가 수릿재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바위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검은 바위를 망부석(望夫石)이라 불렀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 후 백제도 신라 못지않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전지왕 사후 왕위에 등극했다가 일찍 돌아간 구이신왕(久爾辛王)의 뒤를 이은 비유왕(毘有王) 역시 고구려의 남진을 우려했다. 백제는 그동안 고구려의 영토로 침입해 국지전을 펼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는 전력이었다.
비유왕은 동진(東晋)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남조의 송(宋)으로 사신을 보내 친교를 맺는 한편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신라와의 연계를 추진했다.
서방의 북위(北魏)도 평양 천도의 영향을 받았다. 화북을 거의 손에 넣은 그들이었지만 내심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장수왕이 남방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짐작하고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이는 결국 북연(北燕)과의 충돌을 유발했다.
북연은 북위의 대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풍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풍홍(馮弘)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풍홍은 할 수 없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칭신하고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위의 탁발도(拓跋燾)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급해진 풍홍은 주변 각국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북연의 상서(尙書) 양이(陽伊)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것은 이때였다.
북연의 사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신하들을 모았다. 고구려 조정에서도 이미 북위의 북연 침공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연의 사신이 왔으니 무슨 답을 해 주어야 할 텐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대로 소막(昭幕)이 나서서 아뢰었다.
“북연은 선태왕 시절부터 우리와 군신지교(君臣之交)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기에 처했다면 당연히 군사를 내어 도와줘야 합니다.”
대형 우부상은 반대했다.
“지금 우리는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국이 불안정합니다. 당분간은 전쟁을 피하는 게 좋습니다. 일단 사신을 보내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우부상은 꼭 창칼을 들고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피를 흘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전략이었다.
이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불화상이 입을 열었다.
“북연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미 북위가 북연을 병합할 마음을 먹었다면 우리도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아불화상은 사세(事勢)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북위의 도발은 고구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공격은 북연뿐 아니라 고구려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한 장수왕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소. 짐 역시 북위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오. 다만 지금의 처지로는 그들과 전쟁하기 어렵소. 그러니 당장은 실속을 차리는 선에서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오.”
장수왕은 먼저 북위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안하며 북연과의 중재에 나섰다.
북위의 탁발도는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중재를 부탁하는 것을 보고 북위의 위용에 겁을 먹었다 생각해 기고만장했다. 그는 이미 북쪽의 골칫거리인 유연과 화친 조약을 맺었고, 인근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북연을 돕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었다.
탁발도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받아들였지만 북연과의 중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북연의 마지막 보루인 용성을 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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