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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436년, 북위의 탁발도(拓跋燾)가 북연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광개토태왕이 종족의 예로 받아들인 북연왕 고운(高雲)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풍씨(馮氏)에게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북위가 고구려의 제후국인 북연을 멸(㓕)하고 요서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는 것을 그냥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용성에는 고구려와 부여계 주민이 상당수 있었기에 이들의 안위도 고려해야 했다.
장수왕은 고심 끝에 고구려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군사를 움직였다. 장군 갈로맹광(葛盧孟光)이 철기병 2만을 이끌고 서변의 숙군성으로 향했다. 북위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여차하면 용성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북위의 탁발도는 광동장군 아청(娥淸)과 안남장군 고필(古弼)에게 군사를 주어 용성을 치도록 하고 평주 자사 탁발영(拓跋纓)에게 그들을 돕게 했다.
북위군은 북연의 백랑성(白狼城)을 함락시키고 전속력으로 용성을 향해 달려갔다. 용성에 다다른 아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의 건너편 진영에서 고구려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필은 낭패한 얼굴로 아청을 보았다.
“고구려군이 어찌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아청은 아무 말 없이 고구려군 진영을 바라봤다.
“화친의 약조를 깬 것이 아닙니까!”
고필이 분노를 표하자 아청이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
“고구려가 너무 쉽게 화해의 손을 내민다 했소. 어리석게도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오.”
“이렇게 된 마당에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전력으로 싸워서 저들을 격파합시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오. 고구려의 철기병은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위력을 지니고 있소. 잠시 상황을 살핀 후에 대처하는 게 좋겠소.”
아청의 군사들은 용성 서쪽에 진을 치고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양군이 서로 틈을 노리며 팽팽히 대치한 가운데 성안에서는 한바탕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북연의 조정에는 고구려와의 우호 관계를 중시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당장 눈앞에 닥친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북위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다. 이 두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고구려와 북위의 대치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친북위파의 수장 격인 상서령 곽생(郭生)이 풍홍왕에게 독대를 청했다.
신하들이 물러나가자 곽생이 풍홍에게 조용히 말한다.
“북위의 세력은 화북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고구려를 따르긴 했지만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사태가 종국(終局)으로 치닫는 걸 막으려면 북위와 협상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짐이 북위와 화친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지 않았소. 저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걸 원하지 않소.”
“지금 상황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저들은 고구려군의 출현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을 보인다면 마지못해 받아들일 겁니다.”
“짐은 고구려군과 함께 북위와 싸우는 쪽을 택하겠소.”
풍홍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난번 사신을 장수왕에게 보냈을 때 여차하면 고구려로 망명하겠다는 뜻을 전한 바 있었다.
곽생은 풍홍이 고구려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불안해졌다. 만일 고구려군이 입성한다면 북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과 같은 자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북위군이 먼저 입성하도록 돕는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바뀌어도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양군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용성의 서쪽 성문이 활짝 열렸다. 곽생을 필두로 한 친북위파가 선수를 쳐서 성문을 연 것이었다.
이를 보고받은 아청은 함부로 나서지 않고 상황을 살폈다.
고필은 답답한 마음에 아청을 재촉한다.
“아니, 성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저들이 성을 들어 바치는데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까?”
“너무 쉽게 성문을 연 것이 의심스럽다. 풍홍의 속임수일 수도 있으니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아청은 고구려군이 버티고 있는데 이리 쉽게 성문을 열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고구려군과 결탁하여 북위군을 성으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북위군이 성안으로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곽생은 차츰 초조해졌다. 반대파가 금방 이를 알아차리고 달려올 것이기에 마냥 성문을 열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성 밖 멀리서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잠시 후 일대의 군사가 바람을 탄 듯 무서운 속도로 성문을 향해 달려왔다. 기마대의 선두에서 고구려군을 상징하는 백호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곽생은 기겁하고 성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고구려군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곽생의 무리는 손을 쓸 새도 없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들은 거침없는 고구려 군사들 앞에서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성벽 위에 고구려의 깃발이 올랐다. 아청은 그제야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용성은 이미 고구려군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후였다.
갈로맹광은 입성하자마자 친북위파를 제압하고 위풍당당하게 왕궁으로 향했다. 북연왕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궁문 앞에 대신을 내보냈다.
편전으로 들어선 갈로맹광은 풍홍에게 장수왕의 하교를 전했다.
“앞으로 북위군의 공세가 거세질 겁니다. 평주부의 군사가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고구려군이 개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들도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풍홍은 울상이 되어 묻는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전하께서는 먼저 성민을 이끌고 고구려로 피하십시오. 저희가 이곳에 남아 북위군의 추격을 막겠습니다.”
갈로맹광의 권유를 받은 북연왕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다. 풍홍은 신하들에게 피난 갈 채비를 시켰다.
용성을 떠나는 날, 어가에 올라 성문을 통과하는 풍홍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했다. 모든 게 자신이 무능한 탓이었다. 형인 풍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후로 북연의 국세는 날로 기울었다. 게다가 고구려와 북위 두 강대국 사이에서 부대끼며 큰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내고 지내 왔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고단한 망명객 신세가 된 것이다.
풍홍은 수레에 앉아 참담한 표정으로 뒤따르는 군사와 백성을 바라봤다. 그들의 암울하고 지친 모습을 보며 왕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풍홍의 무리가 떠난 후, 갈로맹광은 군사를 시켜 왕궁과 민가에 불을 놓았다. 그러고는 부대를 정비해 숙군성으로 후퇴했다.
북위 장군 아청은 수많은 인파와 수레가 동쪽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청이 안남장군 고필을 보며 말한다.
“연 왕이 고구려로 달아나면 연나라 땅은 그들의 영향 아래 놓일 것이오. 그리되면 우리의 동진(東進)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오.”
고필이 펄쩍 뛰며 나선다.
“지금 당장 쫓아가서 풍홍을 잡겠습니다.”
“우리 군사만으로는 고구려군의 위세를 당해낼 수 없소. 고구려 철기병은 일당백인데다가 수적으로도 아군을 능가하오. 섣불리 쫓아갔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소.”
고필을 말리기는 했지만 아청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고구려군과 건곡일척(乾坤一擲)을 겨루고 싶었다. 하지만 장수는 기분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 현실을 냉정히 판단하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군대를 책임져야 하는 수장(首將)의 의무였다.
아청은 지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적어도 세 배의 병력은 되어야 고구려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주 자사 탁발도는 고구려군이 용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지레 겁을 먹고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평주는 과거 조선을 거쳐 연의 지배를 받다가 광개토태왕 대에는 다시 고구려의 관할 아래 놓였다. 근래에 와서 북위의 지배를 받고는 있지만 주민의 상당수가 부여인과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싸움을 꺼렸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아청의 군사들은 멀어지는 고구려군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북위왕 탁발도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노했다. 그는 산기상시 봉발(封撥)을 고구려로 보내 풍홍의 소환을 요구했다. 그런다고 장수왕이 호락호락 응할 리가 만무했다.
탁발도는 즉각 중신들을 모아 고구려 칠 일을 의논했다.
낙평왕 탁발비(拓拔丕)가 만류한다.
“고구려는 이제까지 우리가 정벌해 온 나라들과 다릅니다. 그들의 전력을 보면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 싸운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북쪽의 유연(柔然)과 남쪽의 송(宋)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하옵니다.”
탁발비의 말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승냥이 같은 주변국들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북위왕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북위는 얼마간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요하를 건넌 풍홍은 요동성 근처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고구려 장군 갈로맹광이 용성을 깡그리 태우고 숙군성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북연왕은 가슴을 치면서 한탄했다. 북위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는커녕 이제 돌아갈 곳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크게 낙담했지만 자신이 돌봐야 할 목숨을 생각하니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고구려의 힘을 빌려 북연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이때, 장수왕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사자는 북연 왕 앞에 나아가 자신을 소개한다.
“평양성에서 온 대형 우부상이라 합니다.”
풍홍은 우부상이 고구려 조정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인물임을 알았다. 그를 통하면 고구려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우부상이 장수왕의 교지를 전했다. 이를 받아 본 풍홍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용성주(龍城主) 풍홍은 보아라. 원로에 노고가 많았다. 그대가 당한 참사는 안타까운 일이다. 짐은 그대와 가솔들이 부족함이 없도록 거처를 마련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부디 이 나라에서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하라.”
이는 풍홍을 한 나라의 왕이 아닌 일개 성주로 취급하겠다는 뜻이었다. 한 나라의 조정이 옮겨 온 게 아니라 일개인의 망명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연나라를 재건하거나 동맹으로서 구원을 요청할 명분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풍홍은 즉시 장수왕의 의도를 간파했다. 장수왕은 북연을 지키기 위해 북위와 적극적으로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임동주 글 김종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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